- 자해 묘사가 있습니다.
- 자살 묘사가 있습니다.
- 사람에 따라 잔인할 수도 있는 묘사가 있습니다.
진재유는 의식이 설핏 돌아왔다는 걸 느꼈다. 한 칸짜리 와이파이로 인터넷을 쓰는 것처럼 뇌가 느릿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은 더디게 이루어졌다. 그의 신체가 바닥 위에 깔아둔 이불 위에 누워있는지, 솔잎이 덮인 부엽토 위에 나뒹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정신은 허공을 부유하는 것처럼 편안했다. 뇌는 뉴런이라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뉴런은 자기들끼리 그물처럼 연결되어 정보를 처리한다고 한다. 그때 생물 선생님은 뉴런을 은하에 비유하며 사람들은 각자 뇌라는 우주를 품고 살아간다며 황홀해했다. 그렇다면 지금 그는 뇌라는 우주에 갇혀 홀로 떠다니는 우주비행사라 할 수 있었다. 우주선과 연결된 선이 끊긴 우주비행사를 기다리는 건 외로운 죽음뿐이지만 고독은 목화솜 넣은 묵직한 이불처럼 포근했다.
뇌가 천천히 감각기관이 전달해주는 정보를 처리하면서 어두운 방의 문이 열리며 빛 한 줄기가 새어 들어오듯 외부의 자극이 공허한 상태를 깨뜨렸다. 제일 먼저 트인 건 귀였다.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발소리, 달달 굴러가는 바퀴 소리.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건 뻑뻑한 머리가 드디어 사고라는 걸 할 수 있을 정도로 돌아간 뒤였다. 숙소라면 바퀴 소리가 날 리가 없었고, 사고 현장이라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아니면 그대로 사고 현장에 방치된 건가? 그렇다면 발소리는 왜 들리는 거지?
애초에 그는 왜 스스로가 산 중간에 박살 난 차의 잔해와 함께 바닥을 뒹굴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아무리 대한민국이 잊을 만하면 대형 참사가 터지는 박복한 나라일지라도 농구 좀 하는 고등학생일 뿐인 진재유에게 사망 사고는 우리은하와 다른 은하 사이 간격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파고들어야 했다. 일단 나는 누구인가? 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인 진재유, 진재간둥이며 최연소 퇴물이었고, 결국 지상고의 에이스고 사령탑이 된 진재유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슴의 통증이었다. 그래. 기억이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 그는 준수와 뒤엉킨 채 버스 바닥에 엎어졌다. 가슴이 딱딱한 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허파에서 공기가 빠져나갔는데 사람의 체중이 몸을 짓눌러 숨이 막혔다. 압박감도 잠시, 굉음이 들리며 강한 진동이 신체를 덜컥 흔들었고 한순간에 바닥의 경사가 기울어지더니 몸이 중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떠올랐다.
재유는 아교를 발라놓은 것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환한 빛이 눈을 찔렀다. 머리를 현기증이 휘저었지만, 몸을 더듬어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이 어디 있지?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점차 눈이 밝은 빛에 적응했지만, 시야가 흐릿해 사물 식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흐릿한 잔상이 울렁울렁 네 개로 쪼개졌다가 합쳐지길 반복했다. 초점 맞추는 걸 포기하고 흐릿한 그대로 주변을 파악했다. 그는 이동식 침대 위에 누워있었고, 팔에는 수액 바늘이 꽂혀 있었다. 사방을 체크무늬가 들어간 연하늘색 커튼이 벽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렇다. 여기는 병원이다. 갑자기 공포가 엄습해 왔다. 그가 제일 두려워하던 게 현실로 일어난 걸까? 죽지도 못한 채 혼자 살아남은 걸까?
그는 밑이 꺼져 지구 내핵까지 무한히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아니,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몸이 오한이 드는 것 같고 손끝만 차게 식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죽는 방법이야 많이 안다. 손목 긋기,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 차도나 전철에 뛰어들기…. 그렇지만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와서 죽는다고… 잘못을 만회할 수 있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나? 머리가 빙판 위의 차 바퀴처럼 적절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헛돌았다.
차가 급발진해 엉뚱한 전봇대를 들이받기 전에 커튼이 휙 젖혀졌다. 이현성이었다. 그는 재유가 깨어 있는 걸 보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양손으로 비볐다. 짧은 찰나에 얼굴에 수십 가지 희로애락이 스쳐 지나갔다. 이마에 석 삼 자 깊은 고랑이 패여 있지만, 몸 상한 곳 없이 무사해 보였다.
재유가 혼란에 빠져있는 새, 이현성은 커튼을 젖혀 의사를 부르곤 보호자용 철제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재유의 머릿속을 물음표가 메웠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그의 얼굴에 드러난 노화 정도를 보면 시간이 오래 흐르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서 니는 괘안나?”
그는 그새 사람이 10년은 늙은 듯한 진 빠진 목소리를 냈다. 재유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니가 못 깨서 애들이 참 많이 놀랬다…. 내도 그렇고.”
이현성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줬다. 아침에 준수가 문을 부숴저라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일어났는데 사정이 뭐인고 하니 재유가 못 일어난다는 거였다. 그냥 늦잠일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준수가 호들갑 떨 사람은 아니었기에 확인하러 갔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 흔들어도 안 깨는 데다 재유가 물에서 막 건진 미역처럼 맥을 못 춰서 바로 구급차를 부른 게 아침에 있었던 일이었다. 등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그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 같다는 건 다행이었다. 근데 그러면 지금 대체 시간이 몇 시지?
마침 의사가 들어왔다. 그는 질문도 던져 보고 이것저것 확인해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많이 피곤한 상태고, 과로 상태 비슷하게 인지 능력이 떨어진 상태인 것 같은데 원인을 모르겠으며 일단은 큰 문제가 없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의사가 나가자마자 이현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열을 가라앉혔다. 눈썹 사이 깊게 팬 주름에서 먹물께나 먹었다 하는 양반들이 다 같이 고개만 갸웃거려서 얼마나 속이 터졌을지가 느껴졌다. 그렇지만 재유는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니 핸드폰 여기 있다.”
이현성은 바지 엉덩이 주머니에서 재유 휴대폰을 꺼내 건네주었다. 시간은 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현성은 그가 휴대폰을 확인하게 두다가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어머니께서 니 데리러 온다고 하신다. 그래도 괜찮다고 연락드렸다.”
“………언, 언…제쯤 도착하신대요……?”
진재유는 말을 떨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가 딱딱 부딪혀 말이 더듬어 나왔다.
“글쎄. 채비 하고 바로 출발한다 하셨으니 오후에 도착하시지 않을까?”
이현성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재유를 미심쩍게 쳐다보다 신신당부했다.
“내 전화받고 돌아올 테니 가만히 있어라.”
이현성이 커튼을 젖히고 나간 뒤, 재유는 곧장 커튼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그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했다. 지방 시내에 있는 작은 응급실이라도 다치는 사람은 어찌나 많은지 의료진들이 잰걸음으로 바삐 돌아다니며 환자를 확인해야 했다. 이현성은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재유는 이현성이 갑자기 튀어나와 붙잡아갈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의 행방은 곧 알아낼 수 있었다. 복도 끝 창틀에 팔을 얹고 이현성이 전화를 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렴풋이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재유는 바퀴 소리가 나지 않게 수액 걸이를 들고 화장실 칸에 들어가 팔을 내려다봤다. 팔뚝에 예방 접종 주사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살벌한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주삿바늘을 고정해 둔 의료용 테이프 끄트머리를 붙잡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도 주삿바늘은 무서웠다. 눈을 꽉 감고 바늘을 뽑았다. 혈관 벽이 바늘 끝에 긁힌 건지 팔이 욱신거렸다. 상처 부위를 엄지로 누르면서 병원을 빠져나갔다. 먹구름이 두텁게 낀 하늘에서 포슬포슬 빗방울이 떨어졌다. 큰길로 나가 팔을 흔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장천 체육시설로 가주세요.”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 케이스에 껴놓고 다니는 비상금 5만 원을 콘솔박스에 올려놓고 내렸다. 학생! 거스름돈 받아 가야지! 뒤에서 기사님이 불렀다. 거스름돈 필요 없으니까 가지세요! 그는 대충 소리치고 체육시설 계단을 뛰쳐올라갔다.
곧장 원중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방에 배 깔고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던 우수진의 허리 위로 조재석이 십자로 포개진 채 게임을 하고 있었고, 3학년들이 구석에 소라게처럼 이불을 말고 누워 있는 휘성을 귀찮게 괴롭히고 있었다. 다들 점심시간 후의 애매하게 짧은 자유시간을 친구와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그 왁자지껄한 생기가 동영상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뚝 끊겼다. 스릴러 영화에서 연쇄살인마가 나타나면 구석진 곳에 숨어있는 주인공 일행이 최대한 숨을 죽이듯 말이다. 재유는 방을 찬찬히 훑어봤다. 그의 온 신경은 쑥색 배낭에 집중되어 있었다. 가방은 열린 캐리어 옆에 놓여 있었다. 배낭을 어깨에 걸치고 복도로 나왔는데 등 뒤에서 우당탕거리는 소음이 들리며 벗겨진 슬리퍼 한 짝이 앞으로 튕겨 나왔다. 뭔가 가방을 세게 잡아당겼다.
“야…! 내 가방 돌려줘…! 거기 뭐 들어있는 줄 알고 그래! 이리 내!”
휘성이 팔을 뻗어 배낭 끄트머리를 낚아채 잡아당겼다. 벌써부터 몸이 제대로 안 가눠지는지 휘청거리며 탱탱볼처럼 양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남의 귀에 들어가는 걸 경계하느라 작게 낮춘 목소리에서는 희미하지만, 짜증으로 덮어놓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재유는 가방에서 삼지창을 꺼내 휘성의 얼굴 앞에서 까닥까닥 흔들었다. 휘성은 눈을 멍청하게 끔뻑거리다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는 충격에 빠진 채 중얼거렸다. 재유는 자신이 쓸 부적을 돌돌 말아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고 배낭을 휘성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잘 부탁한다?”
재유는 친근하게 휘성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휘성은 얼음땡 놀이에서 누가 땡을 외쳐준 듯 그제야 정지 상태에서 빠져나와 허겁지겁 재유를 설득했다.
“너, 이럴 때가 아니라,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해. 이모 연락처 알려줄 테니까… 이거거든? 당장 부모님이랑 얘기해서 연락해. 돈은 좀 내야 하겠지만 절대 사기 아니고 돈 좀 내고 평범하게 사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폰 줘 봐.”
휘성은 허둥거리며 주머니와 가방을 뒤진 뒤에야 휴대폰을 포함해서 메모를 남길 수단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재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유는 손을 휘적거리며 대충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
“그럴 필요 없다.”
“농구 못 하고 싶어? 너 이대로 가면 얄짤없이 박수무당 해야 돼! 평생 신당에 처박혀서 남 앞날이나 봐주면서 귀신 수발들면서 살아야 한다고!”
휘성이는 재유의 무신경한 태도에 자신이 다 답답한지 열불을 터뜨렸다. 재유는 허탈함 때문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남이 겪게 방치할 수 없다는 선량함. 이게 그의 본성이었다. 재유는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웠다. 한가하게 밤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불러내야 하는데, 단지를 깼을 때 호환귀가 바로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두 시간 내에 온 산을 뒤져 그걸 찾아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지도를 찾을 수는 있지만 그게 정확한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어쨌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환자복 신세는 면했다지만 잠옷으로 입던 반자비, 반소매 차림으로 산을 쏘다닐 수는 없었다.
재유는 지상고 숙소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팀원들이 방 중앙에 둘러앉아 있었다. 태성이 박물관에 전시해도 손색없을 낡은 책을 낭독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글자가 나와 문장이 끊어지면 희찬이 휴대폰으로 찾아보거나 다은이 알려주었다. 불현듯 옛날에 다은이 동생들이 한자 학습만화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푸념했던 게 떠올랐다. 상호가 휴대폰 액정을 두드리다가 재유를 발견하고 한 손을 흔들었다. 활발한 정보 교환과 의견 제시. 그 모든 걸 경청하던 성준수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심각하게 찌푸려져 있던 표정이 재유를 보자 확연하게 밝아졌다.
“재유. 상태는 어때? 몸은 괜찮대? 너 진짜 내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준수는 곧장 그가 오늘 얼마나 놀랐는지 걱정 섞인 투정을 늘어놓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재유는 혼란에 빠졌다.
“음…. 놀랐어? 사실 네가 오늘 좀 이상해서 나름 조사를 해보게 됐어.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맥 추고 있잖아…. 에이씨….”
준수는 정작 장본인과 진솔한 대화를 하려니 할 말이 궁색해졌는지 뒷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그렇지만 다른 팀원들은 오직 준수가 재유에게 사실을 물을 정당한 자격을 지녔다는 듯 그를 기다렸다. 심지어 ‘전하 말솜씨로 쪽박이나 깨지 뭔 말을 해요!’ 따위로 야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야 할 태성조차 암묵적 합의를 존중했다. 점차 준수는 그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깨달아갔다.
“창고에 소금 엎어져 있던 거, 네가 어제 상자 같은 걸 깬 거지? 너 거기 간 적 있잖아. 매트 사이에 MP3 숨겨둔 거 발견했어. 거기서 뭔 □같은 게 풀려났고 그거 때문에 오늘 계속 데쳐진 시금치처럼 흐느적거렸던 거야? 다 네 잘못인 것 같아서? 우리한테 할 말 없어? 너 혼자 생각에 끙끙 앓으면서 땅 파고 들어가는 거 정말 미련한 거 알아?”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준수의 말투는 날카로웠지만 재유를 보는 눈빛에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그는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친구를 걱정하고 있었다. 재유는 빨랫방망이가 두들기는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들은 재유가 몇 날 며칠을 반복해서 알아낸 사실을 반나절 만에 얼추 파악해 냈다.
“같이 하자. 도와줄게. 우리가 뭘 하면 돼?”
준수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보이는 더없는 신뢰였다. 재유는 일순 분노가 치밀었다. 최소한 준수는 재유의 행적에 있는 시간적 무리수를 눈치챘을 것이다. 이전에도 그런 적 있으니까. 하지만 성준수는 모순도 덜 밝혀진 사실도 묻어놓고 재유에게 전적인 협조부터 바쳤다. 왜 내 입으로 지시를 내리라고 요구하는 거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너는 맞서 싸우러 갈 거잖아. 그게 아무리 가망이 없더라도, 네가 죽더라도! 재유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준수는 농구를 할 때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적절한 판단을 내릴 거라 믿고 있었다. 이미 나 때문에 몇 번이고 죽었는데 이제는 내가 직접 죽음으로 내몰아야 한다고? 성준수는 지금 다른 팀원들의 의사 또한 대표하고 있었다. 여기는 코트 위가 아니다. 그의 선택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다. 그렇다면 그들도 재유가 판단한다면 기꺼이 희생할 거라는 건가? 이미 나 때문에 그렇게 죽어 자빠졌는데 직접 나보고 지시를 내리라고?
진재유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몸을 기대자 덜 닫힌 문이 열리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준수가 그를 일으켜 세워 주려고 다가왔다. 재유는 바닥을 발바닥으로 밀어내며 복도를 곁눈질했다. 휘성은 흥분해서 몸에 무리가 간 모양인지 벽을 짚고 헐떡거리고 있었고 따라 나온 조재석이 휘성의 등을 쓸어주다 재유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재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삼지창 손잡이를 쥐고 날 끝을 목에 갖다 댔다.
“가까이 오지 마….”
재유는 낮게 읊조렸다. 준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성큼 다가왔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재유는 소리 지르면서 창날로 목을 세게 눌렀다. 이 어정쩡하게 뭉툭한 날은 충분히 사람 살갗을 뚫을 수 있었고, 그에게 필요한 건 용기뿐이었다. 목구멍이 눌리면서 호흡이 거북했다. 어느 임계를 넘어서자, 톡, 샤프심으로 컵라면 비닐을 뜯을 때 같은 느낌이 들면서 압박감이 약해졌다. 경악한 희찬이 재유를 가리키며 입을 벙긋거렸다. 옆에서 팔이 튀어나와 삼지창을 뺏으려 들었다. 재유는 휘성의 팔목을 붙잡고 등으로 가슴을 받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태성을 향해 매쳤다. 무게중심을 다루는 요령만 있다면 키만 크지 앓느라 힘이 빠진 사람을 업어치는 건 방해 없이 2점 슛 넣는 것처럼 간편했다.
재유는 주변을 경계하며 도로 창으로 목을 겨눴다. 악몽을 꾸다 일어난 것처럼 티셔츠 목 부분이 축축했다. 그는 저열한 승리감을 느끼며 성준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준수는 뻣뻣하게 굳은 채 희미하게 인상을 쓰고 재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점차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재유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라 감정을 해석하는 데 약간 시간에 걸렸다. 그는 너무 충격받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준수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온몸이 크게 덜컥거렸다. 재유는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재유에게 덤벼들려고 한 건지 어정쩡하게 서 있던 재석이 옅은 경멸을 드러내며 미친놈 건드리지 않을 테니 곱게 지나가라고 몸을 벽에 붙이며 공손하게 팔을 굽혔다.
그때, 뭔가가 재유의 뒤통수를 때렸다. 바닥에 비닐 케이스에 든 부적이 떨어졌다.
“가지고 가버려! 아주 저리 가버리라고!”
성준수가 소리질렀다. 예전에 같이 매점에 갔다가 준수 지갑에 부적이 들어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이런 걸 가지고 다닐 성격은 아니었길래 궁금해서 물어보자, 어머니가 줬다는 답이 돌아왔다. 준수에게 냉랭하게 잘생긴 얼굴을 물려주신 분이지만 자식을 먼 타지로 보내는 게 불안하셨는지 무속인에게 받아온 액운 쫓는 부적을 받아와서 쥐여줬다고 했다. 준수는 부적을 마뜩잖아했고, 늘 지갑에서 동전들 틈바구니에서 방치되었지만 절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게 신호탄이 되었다. 희찬이 상호의 짐가방에서 급하게 청포도 맛 사탕 한 움큼을 꺼냈다.
“이, 이것도 가져가세요. 저 긴장될 때 먹는 사탕인데, 이거 먹으면 뭔가 좋은 꿈 꾸고 하여튼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러니까 가서 힘들 때 까먹으세요.”
희찬이 감정이 복받쳐 울먹거렸다. 희찬은 먹는 데 취미가 없다. 그러니 저건 그냥 잘될 거라는 믿음을 담아 건네는 것에 불과했다. 속속들이 각자 의미를 부여한 물건이 모였다. 헤어밴드, 만화 캐릭터가 수놓아진 일본식 부적, 핸드크림, 염주, 가죽 줄을 단 나무 조각 목걸이…. 그의 여정에 크든 작든 힘을 보태준 사람들이 부적을 내밀었다. 그의 무사를 바라는 염원이 그의 손바닥 위에 소복하게 쌓였다.
재유는 더든 견딜 수 없어서 누군가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성준수는 화장실 세면대에 찬물을 틀어놓고 얼굴에 연거푸 끼얹었다. 산속 수도관에서 나오는 물은 손가락이 얼얼할 정도로 시원했지만, 가슴속에서부터 타오르는 천불을 꺼뜨릴 수는 없었다. 그는 세면대를 꽉 붙잡고 식식거렸다. 폐에 공기를 꽉꽉 밀어넣고 빼내길 반복했지만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진재유 개자식, 머저리, 빡추, 등신. 그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육두문자를 입 밖으로 뱉지 않은 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덕이었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희찬이 작게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는 거울을 통해 준수와 눈이 마주치자 풀 죽은 목소리로 조그맣게 물었다.
“…괜찮아요?”
너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걸 억눌렀다. 잘못 없는 애한테 짜증을 낼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한심한 집단이든 간에 리더라면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해야 한다는 걸 지금의 그는 안다. 그게 코트 밖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동작이 신경질적이라 그가 품은 반발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화가 자신을 향하지 않아서인지 희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쪼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준수햄은 재유햄이 와 그랬는지 알겠어요?”
“그 새□가 왜 그랬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준수는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말을 뱉으니까 짜증이 도로 치밀어서 찬물을 거칠게 퍼서 얼굴에 끼얹었다.
“……죄송해요. 그냥 물어보고 싶었어요. 재유햄은 준수햄이랑 제일 친하잖아요. 그래서 햄은 뭔가 알까 했어요….”
준수는 짜증이 울컥 치솟았다. 친해 봤자 뭐하나. 그 자식 무슨 생각 하는지 짐작할 수도 없는데. 그는 재유가 제 신체를 인질 삼아 사람을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고, 그렇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진재유는 자신이 그렇게 비겁한 사람이라는 걸 숨겨오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용했다. 억지로 내리눌렀던 분노가 다시 들썩거렸다.
“저는 재유햄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어요……”
준수가 격노하든 말든 자신만의 우울에 빠져있던 희찬이 툭 내뱉었다. 그 말이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정희찬에게 존재하는 포인트가드로서의 자질을 하나 꼽자면, 인물 보는 안목이다. 그는 사교성이 좋은 만큼 사람 파악에 뛰어났다. 준수에게 한 줄기 광명이 비쳤다. 어쩌면 그가 속은 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자. 내가 알던 진재유는 어떤 사람인가?
진재유는 농구를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다. 좋아하는 만큼 열심히 해서 무리하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생각이 많은데 남들한테 말하는 법이 없어서 답답할 때가 있지만, 그만큼 현명하고 사려 깊었다. 그래서 성준수는 진재유를 신뢰했다. 이렇게 농구를 열심히 하고 머리 좋고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내리는 판단은 다를지언정 틀릴 리가 없었다. 점점 생각이 확신을 얻어갔다. 2년 남짓한 시간일지라도 그 모든 걸 연기하는 건 불가능했다. 재유는 절대 자신의 신체를 볼모로 남을 협박하는 비참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비참함. 준수는 자신이 선택한 단어에 흠칫 놀랐다. 답은 제 안에 있었다. 열쇠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데도 다른 곳을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열쇠를 어디에 써야 할지는 몰랐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재유는 왜 그랬을까? 그때 재유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을 하고 창끝으로 목을 짓눌렀다. 상처 가장자리는 뭉개져서 우둘투둘했고 흘러나온 피가 티셔츠 목을 흥건히 적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재유는 겁에 질려 있었고, 나무토막이 빠져 구멍이 숭숭 난 젠가처럼 위태로웠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자기 몸에 플라스틱 자 정도로 두꺼운 날을 꽂아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아팠을까? 커터칼에 베여도 상처에서 피 쏟아지는 걸 보면 무섭고 아프고 놀라는 게 사람인데.
분노가 식으면서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너무 속상했다. 뭐가 마음이 굳센 친구를 그렇게까지 벼랑 끝에 몰아버린 걸까? 모르겠다. 말하지 않으니 알 수 없었다.
동시에, 심장에서부터 뜨거운 결의가 끓어올랐다. 재유를 그따위로 망가뜨린 증오스러운 무언가를 결딴내놓겠다고. 그리고 지만 잘난 줄 아는 미련한 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테다. 혼자만 끙끙 앓는 못된 버릇을 이번에야말로 고쳐놓을 테다.
준수는 희찬 양 어깨를 붙잡았다.
“야. 궁상 그만 떨어. 내가 재유 꼭 붙잡아 올 테니까, 그놈 추궁할 준비나 하고 있어. 사정 봐줄 필요 없이 아는 거 다 쥐어짜 버려.”
희찬은 비실비실 웃었다. 준수의 눈이 샛별처럼 이글거렸다. 그는 자신이 말한 바를 실현해낼 것이다.
사건 현장에서는 윤경택 감독이 학생들을 사정 청취하고 있었는데, 실상은 상호 달래기에 가까웠다. 충격이 컸는지 그가 계속 훌쩍거렸기 때문이었다. 지상고 1학년들은 상호 위로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사정을 제일 모르는 조재석이 설명을 도맡게 되었다. 준수도 상호 걱정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다가갔다. 별안간 상호가 눈을 번쩍 뜨고-솔직히, 기상호는 정색한 채 눈을 똑바로 뜨면 좀 소름끼쳤다.- 살짝 고개를 젓더니 도로 우는 시늉을 했다. 준수는 그제야 이게 서로 짜고 치는 연기라는 걸 알아차렸다. 저 교활해 빠진 놈 같으니라고. 그는 상호를 기특해하며 구석에 다리 한 쌍이 삐져나온 이불 뭉치에 등을 기댔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곳은 매우 수상했다. 산 끼고 있어서 그런가 건물이 좀 음습하다 싶었지만, 곳곳에 부적이 붙어있는 걸로 모자라서 불길한 상자가 부서진 채 창고에 처박혀 있고, 이상한 거 봤다는 애들까지 나온 데다, 재유까지 그 모양이니 이걸 그냥 기분 탓으로 여길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태성은 건물에 붙어있는 부적에 주목했다. 이렇게 구석구석 붙일 지경이라면 최소한 건물 주인의 동의가 있었을 거라는 거였다.
이불은 집요하게 꿈틀거리면서 사색을 방해했다. 여기에는 사내 새□들밖에 없는 데다 깔고 앉은 것도 아닌데 뭐가 대수란 말인가? 그는 이불을 팔꿈치로 인정사정없이 푹푹 찔러 저항을 진압했다. 즉시 보복이 날아왔다. 이불 밑에서 손이 옆구리를 꼬집어 비틀었다. 준수는 이런 옹졸한 짓을 하는 놈의 면상을 확인하고자 얼굴이 있을 위치의 이불을 확 벗겼다. 이휘성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상태는 측은지심이 존재한다면 마땅히 안위를 걱정해줘야 할 정도로 초췌했다. 운동부 고등학생이란 돌도 반찬 삼아 씹어 먹을 수 있는 존재이거늘 그의 낯빛은 물속에서 3일간 팅팅 불은 시체처럼 핏기가 없으며 실핏줄이 터져 흰자가 분홍빛을 띄고 있었다. 준수는 편히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공손하게 이불을 도로 덮어주었다.
이휘성은 손만 이불 밖으로 뻗어 검지를 까닥거렸다. 허리를 기울여 귀를 가까이 데자, 그가 소곤거렸다. 이제 어떡할 거야? 준수는 망설였다. 남고 다니는 남자 □끼들의 지성이란 원숭이와 호형호제가 가능하고 돌고래보다 덜 발달된 수준이라 그 틈바구니에서 똘똘한 애들은 까마귀 사이의 백로처럼 티가 난다. 원중고에 짧게 있었다지만 이휘성은 키가 아주 크다는 걸 빼면 기억에 남는 게 없었고, 그 말인즉슨 이놈도 설치지만 않을 뿐이지 지국민이나 박교진처럼 돌대가리라는 소리다. 그러나 경기를 뛸 때 이때 던지면 3점 슛이 들어갈 거라 속삭이던 직감이 이번에도 정보를 공유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는 이게 헛수고가 아니길 빌면서 지금까지 알아낸 것, 자신의 의견 등등을 설명했다.
준수는 문득 이놈이 잘 듣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서 살짝 이불을 들춰 보았다. 이휘성의 눈이 느릿하게 감기고 있었다. 기겁하며 그를 마구 흔들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영원히 못 일어날 것 같았다. 밑 빠진 독처럼 사람 몸에 담긴 생기가 어딘가에 난 금으로 줄줄 새고 있었다. 태성이 쿠션까지 해줬는데 고작 바닥에 내려꽂힌 정도로 이렇게 상태가 악화될 수는 없었다. 불가사의한 힘은 존재했으며, 고등학생 한 명을 명계로 차츰차츰 끌어내리고 있었다.
휘성은 짜증 내며 손을 쳐내며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고개는 지혜를 깨달은 밀처럼 자꾸 쳐졌다. 준수는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이휘성은 재유에게 처음 보는 목걸이를 벗어줬다. 재유는 모든 부적을 챙겨가지 못했다. 몇 개는 바닥에 흘렸는데, 목걸이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걸 준 뒤로 상태가 곤두박질친 것 같으니 이 중 하나를 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은 게 준수의 직감이었다.
“근데 너 재유는 어떻게 찾게?”
준수는 주머니를 뒤지다 말고 얼어붙었다. 고개가 현관을 향해 돌아갔다. 빵조각을 흘린 것처럼 바닥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계획의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단계가 빠져 있음을 깨닫고 자신감 없이 웅얼거렸다.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답 없다는 소리네…. 잘 들어…. 내가 재유를 찾아줄 수 있어.”
“어떻게?”
준수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찰나 동안 그 녀석을 어떻게 잡아 올 수 있을지 수도 없이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놈이 뭔 깜냥이 있어서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순간 이휘성의 얼굴에 깊은 고단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그렇게 주변까지 휩쓸어버리는 불가항력적인 위력은 모를 수가 없는 거야…. 이렇게 머리가 아픈데….”
그러니까 머리에 특정 사람 대상 GPS를 탑재하고 다닌다? 이거 순 스토커 꿈나무 새□ 아냐. 생각이 표정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났는지, 이휘성이 울컥했다.
“야. 내 골통에 구체적으로 위도 경도 좌표가 뜨는 줄 아냐?! 방향만 대강, 에휴… 됐다, 그냥.”
화낼 기운도 없는지 짜증이 갑자기 식었다. 이휘성은 잠시 웅얼웅얼 신세와 인생 한탄을 했다.
“아무튼, 한 시간, 넉넉히 잡아도 두 시간 내에 준비를 다 끝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진재유 있는 데로 데려다줄게. 대신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재유랑 같이 그걸 없애. 알겠어?”
이휘성은 준수에게 단단히 을렀다. 목소리는 죽음이 지척에 다가온 노인처럼 쇳소리가 났지만 압도되는 기백이 느껴졌다. 생사에 초연해진 이의 결연함이었다.
“괜찮겠어?”
“나는 신경 쓰지 마. 내 앞가림은 내가 해.”
“아니, 걸을 수 있겠냐고. 말하는 거 보면 니가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찾을 수 있는 것 같은데, 맞아? 그런데 나는 니 못 옮긴다?”
준수는 이휘성을 미덥잖아하며 위아래로 훑어봤다. 정확히는 옮길 수는 있는데 키 2미터 2센티, 체중 100키로 남짓의 무겁고 부피 큰 취급주의 물품을 나침반마냥 이리저리 끌고다니면 무릎 관절이 상할 거다. 그건 되도록 사양하고 싶었다. 이휘성은 그를 지극히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닭대가리한테 빡대가리 취급당하니까 기분이 굉장히 불쾌했다.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윤경택 감독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복도로 나갔다. 확실히 문이 닫힌 걸 확인하자 상호가 언제 울었냐는 듯 눈가에서 손을 뗐고-조재석이 배신당한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1학년들이 슬금슬금 문으로 이동했다. 준수는 가증스럽게 생겨서 늘 손을 부르는 태성의 머리통을 후려치며 1학년들을 물렸다. 그는 문 바로 옆자리라는 특권과 주장이라는 대표성으로 제일 엿듣기 좋은 자리를 혼자 차지했다.
대화는 그럭저럭 잘 들렸다. 서인진 코치가 말하길 그는 애들 방이 시끄러운 걸 알아차리고 나갔다가 재유가 뛰어가는 걸 발견하고 곧바로 쫓아갔지만 재유는 바로 산으로 뛰어 들어가서 놓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연한 결과였다. 재유는 지상고 내에서는 날랜 편에 속하는데다 독보적으로 체력이 좋으니 말이다.
“경찰 신고는 완료했고요, 이현성이도 택시 타고 빠르게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재유 어머님은 조만간 도착하신다고 하시는데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솔직하게 말해야지.”
“아는데, 그냥 한탄 좀 해봤습니다.”
준수는 인기척을 느끼고 곧바로 호기심에 차 있는 1학년들에게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신호를 보냈다. 안 자고 몰래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문이 열릴 때처럼 다들 민첩하게 행동했다. 경기에서도 이 정도로 빠릿하면 얼마나 좋을까. 곧 들어온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서인진 코치가 수상쩍은 눈빛으로 지상고 부원들을 훑어봤고, 윤경택 감독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준수는 혹시 들켰나 싶어 허리를 곧게 폈다.
“휘성아. 상태는 괜찮느냐?”
“네? 네. 좀 누워있었더니 나아졌어요.”
휘성은 약간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준수는 이 맹추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데 감탄했다.
“다행이구나. 그래도 병원에 갈 거니 준비하거라. 부모님께도 연락드리고.”
“저… 혹시 병원은 언제 갈 건가요?”
휘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경택 감독은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지금 당장. 택시를 부를 테니 나갈 준비 해라.”
준수의 머릿속에도 비상 경고등이 울렸다. 병원에 가버린다면 재유라는 선례가 있기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게 늘 감시가 따라붙을 게 분명했다. 준수는 조재석보다 먼저 선수를 쳤다.
“제가 도와줄게요.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준수는 지상고 져지를 걸치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데리고 갔다. 한때 그는 원중고에 재학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어른들은 준수가 주장답게 옛 친구를 챙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는 휘성이 곧이곧대로 짐 챙기러 방에 들어가려는 걸 슬쩍 뺏어온 다은의 모자를 눌러 씌워주며 걸 잡아끌었다.
“우산 챙겨온 거 아니면 걍 와.”
휘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정오 즈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장마철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빗방울이 굵어진 상태였다. 준수는 망설임 없이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휘성은 그제야 준수가 그대로 도망칠 심산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니도 참 난놈이다. 튈 생각을 하고. 겁도 안 나?”
휘성이 모자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불평하듯 감탄했다. 그는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고, 보통은 무시하지만 오늘따라 대꾸하고 싶었다.
“…나도 쫄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해야 하니까 그냥 하는 거지. 빨리 와.”
그들은 도로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다행이도 나무가 울창해 나뭇잎이 비를 그런대로 잘 막아 주었다. 반대편에서 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체육시설밖에 없는 산을 이 날씨에 오르는 차량이 있다면 탑승자가 뻔했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역시나 택시가 그들 앞에서 멈춰 서더니,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면서 이현성 감독이 머리를 내밀었다.
“니들 거기서 뭐 하노!”
휘성이 준수의 등 뒤에 몸을 숨겼지만 그 키로 택도 없었고, 이현성의 의심을 키울 뿐이었다. 그는 청소년들의 수상한 일탈 정도는 너그럽게 눈감아 줄 심산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뒷좌석을 엄지로 가리켰다.
“일단 타라. 다 젖겠다.”
준수는 현성의 눈치를 살폈다. 이럴 때도 용기는 필요한 법이다.
“죄송합니다!”
성준수는 90도 직각으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얼타고 있는 휘성을 붙잡고 줄행랑을 쳤다.
어릴 때는 집 근처 뒷산에 자주 놀러 갔다. 도토리, 산딸기, 쥐며느리, 다람쥐, 여름철에 운이 좋으면 사슴벌레나 장수풍뎅이까지. 산에는 언제나 놀거리가 풍부했다. 그는 언제나 크게 엇나가지 않고 선을 지키는 아이라 걱정을 사지는 않았지만, 주변 어른들은 심심하면 충고를 늘어놓았다. 산에 들어가면 절대 길을 벗어나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내려오라고.
진재유는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길은 벗어난 지 오래고 비슷하게 생긴 나무와 지형이 반복되어 앞으로 가고 있는 건지 같은 장소를 돌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엘리베이터 양 벽에 마주 보게 달린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경사의 기울기 변화만이 그가 현재 상태로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변화였는데, 방향감각을 되돌려놓기는커녕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무리한 다리 근육에서 느껴지는 통증만이 불안감을 덜어주는 이정표였다.
물에 젖어 미끄러운 돌을 잘못 밟아 비탈에서 미끄러졌다. 이 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나무들이 광합성을 하겠다고 한 톨의 여유도 없이 오밀조밀하게 영역을 나눠 먹은 나뭇잎들이 비를 막아주는 차양 역할을 해 주었다. 멀리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이 들렸다. 지독하게 퍼부을 모양이었다. 먹구름과 나뭇잎의 햇빛 이중 차단 효과로 주변은 해가 진 것처럼 어두워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휴대폰을 챙겨왔지만, 바지 주머니에 같이 들어있는 물건들을 외면하고 싶어 가만히 누워있었다. 낙엽과 부엽토로 구성된 땅은 제법 폭신했다. 시선이 느껴졌다. 바닥을 더듬거리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바닥에 잎맥만 남은 낙엽 부스러기가 달라붙었다.
호환귀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통통한 거미를 붙잡은 아이처럼 귀 끝까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재유도 비실비실 실소를 흘렸다. 아주 만만하다 이거지? 입장을 바꿔봐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인 데다 정신까지 놓고 있는 사냥감이면 아주 우습게만 보일 것 같았다.
방심은 기회다. 재유는 지금까지 산을 헤매면서 한 번도 놓지 않았던 삼지창을 꽉 쥐고 그것의 눈 사이를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그것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숨이 끊어진 건 아니기에 다시 찍었다. 검은 손이 애처롭게 날을 막으려고 했다. 다시 내리찍었다. 손잡이의 나뭇결에 손바닥이 쓸렸다. 다시 내리찍었다. 잘 마른 나무토막이 결대로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다시 내리찍었다. 가운데 날이 부러지면서 그 조각이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높은 곳에서 엄중한 시선이 느껴졌다. 짜증과 약간의 분노가 혼합된 응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재유는 손을 떨면서 삼지창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꽁지에 달린 오색 술에서 처음 봤을 때 느낀, 화려함에 혼이 빠지는 신비함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 무구의 배후 되는 이가 힘을 거둔 것이다.
생각이 휘몰아쳤다. 뭘 잘못했다고? ‘신성한’ 물건을 상스럽게 휘둘러서? 자격 없는 사람 손에 들려서? 사람 피를 먹어서? 대체 왜? 진재유는 내장을 쥐어짜듯 절규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 모두의 염원과 함께했다. 그런데도 실패할 수는 없는 거였다. 겁먹어 움츠려 있던 호환귀는 적수가 취약하다는 걸 깨닫고 점점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때였다. 스마트폰이 그것의 머리에 명중했다. 그것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양 앞발로 머리를 감쌌다.
희멀건 손이 불쑥 튀어나와 재유에게 돌창을 쥐여주었다. 손에서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재유는 헤 입을 벌린 채 올려다봤다. 준수가 그의 곁에 있었다. 육신과 분리되어 붕 떠 있던 혼이 몸으로 도로 들어오면서 인지가 선명해졌다. 내내 희뿌옇게 무뎌져 있던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런데도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친구의 형체는 신기루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뭘 멍때리고 쳐다봐! 정신 안 차려?!”
준수는 일부러 화를 내며 재유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고데기 없이도 늘 쉼표 모양으로 말려 있던 앞머리는 푹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 끝에서 연분홍색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마부터 뺨까지 난 상처 때문에 왼눈을 감고 있는데도 갈라진 눈꺼풀 사이로 홍채가 보였다. 파란 지상고등학교 져지 오른 소매에 검붉은 얼룩이 광범위하게 묻어 있었다. 퍼붓는 비도 그 얼룩을 완전히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건 내 피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준수가 얼버무리며 재촉했다. 초조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깨달음이 번뜩였다. 거짓말을 지지리도 못하는 성준수. 여기까지 혼자 힘으로 올 수 있을 리 만무했던 성준수. 그의 것은 아니지만 본 적 있는 스마트폰. 그 스마트폰 뒷면에 껴 있던 물건. 그를 도와줄 수 있었을 조력자. 하지만 여기에는 없는 조력자. 그리고 심한 외상을 암시하는 혈흔.
“휘성이는 어디 갔노?”
준수는 침묵을 지키며 적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개 □발 □끼 어디 갔어?”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준수가 재유와 등을 맞댔다. 맞닿은 몸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주변에 신경을 기울였다. 요란스럽게 비가 퍼붓고 있었다. 그 사이로 미세하게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공이 확장된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것은 초승달처럼 눈을 휘더니 짓더니 숲의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귀를 활짝 열어도 빗방울이 실로폰 대신 나뭇잎을 두드리는 합주 소리만 들렸다. 자장가로 써도 될 법한, 먹먹하고 편안한 소음이었다. 재유는 준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끼 어디 있는지 알긋나…?”
“아니… 모르겠어. 그냥 간 것 같은데?”
준수는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경계하다 긴장을 풀었다. 원래도 예민한 편이지만 얘가 신경을 곤두세운다면 여간 날카로워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신뢰할 만했다. 그도 많이 긴장하긴 했는지 기상천외한 비속어를 팔만대장경처럼 읊다가 뜬금없이 승리감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미래가 어떻든 현재의 위기를 넘긴 것을 기뻐하는 웃음이었다. 재유는 얼떨떨해해다 뒤늦게 하이파이브에 호응했다.
“일단 돌아가자. 그 시□거는 용건 있으면 또 튀어나오라지.”
준수는 고개를 흔들어 자꾸 눈으로 흘러들어오는 물방울을 털어내고 길을 확인했다. 비탈을 타고 내려오며 흙이 쓸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앞장섰는데, 얼마 가지 않아 흔적은 끊겼다. 원래 있던 나무가 부러진 건지 흰 버섯이 피어난 나무 둥치를 중심으로 공터가 있었다. 이미 푹 젖었지만, 비가 얼굴에 떨어지는 건 성가셔서 나무 밑에서 준수가 휴대폰을 높이 들고 신호를 잡아보려고 애쓰는 걸 지켜봤다. 붕 뜨는 시간이 생기자 손톱 옆 살에 자꾸 손이 갔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누군가 했던 말이 메아리쳤다. 범이 자기 아가리에 들어온 먹잇감을 보내줄 리가 없다….
손끝이 따끔거린다 싶었는데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뒷짐 져서 손을 감추고 하늘을 쳐다보며 손톱을 질겅거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여기서는 풍경이 체육시설보다 더 오밀조밀해서 손을 뻗으면 도시가 한 움큼 만에 잡힐 것 같았다. 마천루는커녕 복층 건물 보기도 어려웠던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는 이 경치야말로 신선의 시야였으리라. 아파트 단지가 비죽비죽 솟아 있었다. 한옥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거쳐 아파트까지 건축물은 주거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발달해 왔고, 거주자들의 편의를 위해 붙어있는 상가는 알록달록한 간판으로 모자이크를 한 것 같았다. 도시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인구 밀도가 높았다. 아주 드물게 멧돼지가 내려올 뿐, 인류는 먹이사슬의 공포를 망각했다. 변변찮은 가죽이 없어 의복을 걸쳐야 하는 종족이 아무 대비 없이 축사처럼 켜켜이 쌓인 집에서 살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이가 딱딱 맞부딪혔다. 준수는 성질을 못 이겨 휴대폰을 바닥에 패대기치려다 재유를 돌아봤다.
“아니다… 우리를 그냥 놔준 게 아니야…. 그놈은 다른 곳으로 갔을 뿐이라고!”
재유는 읍내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준수는 기민하게 재유가 뭘 전달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지 않아도 흰 살갗이 더 희멀게질 수 있다니! 재유는 무작정 뛰쳐나가는 준수의 팔을 낚아챘다.
“니 어디 가려고!”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거기에 있을 거라고 누가 보장하는데? 온 데 사람이 천지삐까리다. 아들 있는 곳으로 갔을 수도 있어….”
준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것은 허기를 느끼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해친다. 그중에서도 지성 있는 존재의 고통과 두려움을 즐기고 싶어 한다. 농축된 악의다! 그러나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친분 있는 사람들과 불특정 다수 중 하나를 택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엇갈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준수는 재유를 쳐다봤다. 지혜가 필요했다. 이럴 때를 위해 팀이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우리는 함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우드락 보드에 연필을 꽂는 소리가 났다. 재유의 왼쪽 눈에 삼지창이 거꾸로 꽂혀 있었다. 눈구멍에 삼지창 끝에 달린 화려한 오색 술이 삐져나와서 꽃의 중심에 꽃술 대신 나뭇가지가 자라난 것 같았다. 핏줄기를 타고 투명하고 젤처럼 말캉거리는 조직이 흘러내렸다. 뒤늦게 준수가 창을 뺏으려 했으나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으로, 아니 광기로 꾸역꾸역 창대를 밀어 넣었다.
재유는 미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게 이렇게 후련할 줄은 몰랐다. 변덕스러운 신에게 저주 있으라, 무능한 얼간이한테 심판 있으라, 아무것도 모르는 애□끼한테 주제 파악 있으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 그를 꽉 끌어안아서, 몸의 신경이 기능을 멈출 때까지 압박감이 느껴졌다. 곧 소리도 들지 않게 되었다. 재유는 숨이 넘어가는 피로에 심신을 맡겼다.
성준수는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1학년들이 밤중에 몰래 컵라면을 끓여 먹으려 했을 때처럼 강렬한 불쾌감이 교감 신경을 활성화시켰다. 사위는 고요한데 풀벌레 울음소리가 색색 숨소리, 요란한 코골이와 어우러졌다. 어슴푸레하게 어두운 방 안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꿈결처럼 흐릿하고 몽롱했다.
그는 어떻게든 잠을 자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목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여분의 베개로 귀를 덮었다. 애매한 새벽이라 지금 당장 눕지 않으면 밝아서 잠을 못 자게 되리라. 하지만 찬 바람이 곧장 들이닥쳐 견딜 수 없을 만치 추웠으며 공태성이 이유 없이 실실 웃는 듯, 전영중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면서 의중 모를 말을 던지듯 무언가가 그의 신경을 계속 거슬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아까부터 그의 뒷전을 잡아당겼다. 운명이 거대한 불행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발 뻗고 누워있는 인간을 들쑤시며 조롱하고 있었다.
결국 준수는 수면을 포기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찬 바람 때문에 몸이 굳어 가위에 눌린 듯 근육이 뻣뻣했다. 도대체 어느 자식이 이렇게 에어컨을 세게 틀어놨단 말인가? 그는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놀라서 흠칫했다. 옆자리에 검은 인영이 앉아 있었다. 조금씩 어둠에 적응한 눈이 그 물체가 뭔지 정체를 알려주었다. 재유였다. 순간 준수는 자신 때문에 재유가 깬 줄 알았다. 그의 성정이 너무 예민했기 때문에, 만인의 비교적 편안한 수면을 위해 그가 사람의 접촉이 제일 없는 구석 자리를 쓰게 되었고, 아무도 원치 않는 그의 옆자리를 재유가 쓰게 되었다. 재유가 제일 준수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이고, 준수 또한 재유가 제일 편했기 때문이다. 재유는 잠에 들면 깨는 일 없이 아침까지 자는 편이라 뜬금없이 이 꼭두새벽에 깨 있다는 게 의아했지만, 당장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준수는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앉은 채로 졸고 있는 모양이었다.
준수는 재유를 눕히기 위해 등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깨지 않게 조심조심 그의 상체를 뒤로 기울였다. 재유의 고개가 줄 끊긴 목각인형처럼 탄성 없이 툭 뒤로 젖혀졌다. 재유? 진재유? 준수가 조용히 재유를 불렀다. 반응이 없었다. 재유의 양어깨를 움켜쥐고 이게 질 나쁜 꿈이길 바라는 만큼 거세게 흔들었다. 재유의 머리가 이리저리 힘없이 까닥거렸다. 현실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악몽의 화신이 수확할 꿈이 적어져 진노한 걸까? 그래서 준수의 악몽을 쫓아준 친구에게 천벌을 내린 걸까? 그렇다면 왜 그게 착한 재유인 거지?
준수는 제 뺨을 한 대 쳤다. 아팠다. 이건 현실이다. 나쁜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진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는 일단 손가락을 재유의 코 밑에 가지다 댔다. 희미한 숨결이 느껴졌는데, 손가락에 끈적거리는 액체가 묻어났다. 피였다. 그는 당장 제일 근처에 있는 머리통을 후려쳤다.
“일어나서 불 켜!”
다은은 빠릿하게 일어나서 조건반사적으로 지시를 이행했다. 상황이 더 뚜렷하게 드러났다. 재유의 티셔츠는 코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은이 눈치 좋게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손에 둘둘 말아 뜯어왔다. 준수는 그걸 받아 재유의 고개를 약간 숙인 뒤, 휴지로 코를 누르며 지혈을 시도했다. 코피를 어마무시하게 흘렸는데도 피가 멈추지 않아서 금방 휴지가 불그죽죽해졌다. 코피라도 피가 멈추지 않으면 위험하다. 그런데 그 위험한 정도가 어느 수준까지지? 혈액량의 30퍼센트가량을 잃으면 과다출혈로 죽는다던데. 이미 늦은 건 아니겠지? 불안감이 몰아닥쳤다.
태성이 야밤에 불을 킨 싹바가지 없는 놈을 찾으며 꿍얼거렸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대량의 혈흔을 발견하고 으깨진 바퀴벌레를 본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밥 하는 거 말고는 도움이 안 되는 □끼. 불행히도 태성의 비명을 알람 삼아 상호와 희찬도 깨 버렸다. 안그래도 불안해 죽겠는데 징징거리고 울먹거리는 소리가 성질을 뒤집어 놓았다. 준수는 불안과 분노와 기타 부정적인 감정들이 폭발 상한선을 넘기 전에 난리통 유발자들을 치워버리기로 했다. 그는 태성의 머리를 노리고 있는 힘껏 베개를 던진 뒤, 희찬을 가리켰다.
“당장 어른들 불러와,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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