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체적인 설정이 붙은 캐릭터가 있습니다.
기상호는 진재유를 보자 뭔가 굉장히 심상치 않다는 희찬이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준수와 함께 밥을 먹으러 들어온 재유는 눈동자가 공허한데도 느껴지는 기운이 드세며 얼굴에서 알쏭달쏭하고 흐릿한 미소가 새어 나오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사회적 규율에 따르려는 이성은 사람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표정에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한다. 그러니 그 웃음은 분위기의 변화가 아니라 이성의 상실, 광기의 징조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던지 준수가 뒤를 돌아 급식실 입구에 달라붙어서 구경하고 있는 지상고 1학년들에게 사나운 눈총을 줬다. 1학년들은 오늘 특히 심기가 불편한 성준수가 입을 열고 비속어를 푸짐하게 내뱉기 전에 빛의 속도로 도망쳤다.
상호는 후퇴하는 김에 그가 직면한 의문-선배의 이상-을 해결하기 위한 약간의 준비물을 구했다. 그는 도로 급식실 입구로 돌아와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재유가 입맛이 없어 보여 일찍 나올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급하게 온 보람이 있게 곧 재유가 급식실에서 나오다 기다리고 있는 상호를 보고 움찔하더니 멈춰 섰다.
“니 거기서 뭐하노? 가서 쉬어라.”
“에이. 쉬라뇨. 이 기상호, 수수께끼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요.”
상호는 실눈을 가늘게 뜨고 재유 어깨를 잡는 척 하면서 등에 부적을 붙였다. 태성이 봤다는 걸 떼어온 거였다. 소금물도 먹여보고 싶었는데 소금을 구할 방법이 없어서 부적만 붙여보게 된 거였다. 재유는 바로 등을 더듬거려서 부적을 떼어냈다.
“니 진짜 뭐하노?”
“강시 놀이요. 이렇게, 얍.”
상호는 부적을 받아 재유의 이마에 붙였다. 부적이 팔랑거리면서 떨어졌고 재유가 참말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상호를 쳐다봤다. 이해를 전혀 못 하겠다는 얼굴이라 더욱 보는 이에게 상처를 주는 표정이었다.
“상호야. 니가 그럴 때 가끔 내는 어떻게 반응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큰 정신적 타격을 받은 상호는 집 나간 수치심의 존재를 깨달은 듯 수줍게 등을 웅크렸다. 그리고 식사를 끝내고 나온, 배에 음식이 들어갔어도 여전히 기분이 언짢은 성준수의 레이더에 상호가 걸려들었다. 그가 으르렁거렸다.
“야. 너 뭐 하냐? 선배가 만만하냐? 싫어하잖아.”
상호는 살길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는 재유는 구원투수처럼 성준수를 바라보다 기회를 틈타 조금씩 멀어지는 중이었다. 구원자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햄! 사격 중지! 상호는 아군이에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다은이 성준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성준수는 듬직하게 상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가 많다. 잘해라.”
상호는 환하게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비가 엇갈린 재유는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허탈감에 눈썹이 슬프게 쳐졌다.
하여튼 재유는 회복이 빨랐다. 그는 야비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시는 후배를 떨어뜨릴 수 없음을 깨닫자 이용해 먹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재유는 바람 쐬느라 열었던 창문을 닫고 상호에게 질문했다.
“니 혹시 셜록 봤나?”
“셜록? 셜록 홈즈요? 어느 작품이요?”
“영국 드라마 말이다. 거기 보면 셜록이라는 사람이 남들 행동 보고 기가막히게 참과 거짓을 가려내든데. 니도 관찰력이 좋지 않나? 그러면 니도 그 사람 하는 거랑 비슷하게 할 수 있지 않겠나.”
“그건 좀….”
“빼지 말고. 셜록 홈즈 모드 기상호가 되는 기다.”
재유는 뒷세계의 은밀한 비밀을 말하듯 상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귀에 속삭였다. 상호는 연출된 꿍꿍이 있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어찌 사건사고를 탐정이 지나칠 수 있으며 기상호는 오늘은 진실을 밝혀내는 탐정 컨셉이니까.
재유가 찾아간 사람은 지국민이었다. 그는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재유가 그를 붙잡아 할 말이 있다고 불러세웠다. 그는 전투에 앞서 탐색하듯 지국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고 얼굴을 응시했다. 그 마모되어 버린 시선에는 불가해한 오싹함이 감돌았다. 지국민은 팔짱을 끼고 불편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지만, 재유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장정이 불쾌감을 드러내는데도 두려움은커녕 아무 동요 없이 평온했다. 선행된 기 싸움이 끝난 뒤, 재유가 먼저 질문했다. 선제공격이었다.
“니 혹시 귀신 보나?”
“뭐? 뜬금없이 뭔 소리야?”
지국민은 심상찮게 폼 잡고 물어본 소리가 그런 거라 굉장히 어처구니없어했다.
“궁금해서 물어봤다. 궁금해서. 근데 니는 아닌갑네. 그러면 니들 중에 귀신 보고 신기 있는 애가 있나?”
“진짜 못 들어주겠네. 야. 그런 거 물어볼 거면 휴대폰이나 보면서 놀던가.”
지국민은 짜증을 냈다. 상호는 지나가던 우수진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인지 아냐고 가리키자,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 자신을 부르는 조재석을 향해 뛰어갔다.
재유는 상호와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말하지 않았지만 의중을 공유했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지국민은 첫 번째 질문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서는 대답을 거부했다. 그는 단순하고 거칠게 생긴 대로 자기 속내를 감추는 데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재유는 본격적으로 허점을 파고들려고 했다.
“니는 와….”
“재유야. 급한데 나 도와줄 수 있어?”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게 분명한 전영중이 친근감 있게 재유의 팔을 붙잡고 데려가 버렸다. 나름 주의를 분산시킨 거겠지만 이미 티가 나도 너무 났다. 상호는 다은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쫓아가지 않았다. 다은이 붙어있다면 괜찮겠지. 그는 판단 결과에 따라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해 단독 행동을 개시했다.
재유는 누굴 찾고 있는가? 원중고등학교에서 귀신을 보는 학생을 찾고 있다. 그럼 그 사람은 누구인가? 기상호는 선택지를 소거해 나갔다. 일단 지국민은 아니다. 전영중도 아니다. 보수적인 성향인 전영중은 그런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주의를 끄는 짓을 하지는 않겠지. 우수진도 반응이 딱히 없으니 아닐 가능성이 컸다. 우수진과 친한 조재석도 마찬가지다. 조재석이 귀신을 본다면 우수진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고, 안다면 티가 났을 것이다. 그런 반응은 수의적이기에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니까.
소거법에 의해 남는 사람은 박교진과 이휘성. 기상호는 그 둘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체육시설을 돌아다녔다. 만약 둘 다 아니라면 조재석, 우수진의 순서대로 용의선상을 넓힐 작정이었다. 그는 2층을 돌아본 뒤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은 얼핏 보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상호는 무대 단상에 쳐진 커튼 모퉁이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리로 다가가서 커튼을 젖혔다. 이휘성이 쪼그려 앉아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 큰 몸을 웅크려 최대한 표면적을 줄인 모습이 호랑이가 지나가기만을 비는 토끼 같았다. 뭐가 그를 그리 겁에 질리게 했을까?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는 그들밖에 없었고 잿빛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비치는 창문들만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신을 보기에는 아직 밝다 싶은 색의 하늘이었다. 상호는 이휘성의 옆에 같이 쪼그려 앉아 그의 표정을 관찰하며 등을 톡톡 두드렸다.
이휘성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상호는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크고 창백한 손바닥이 그의 잎을 덮어 말하지 못하게 막았다. 입가에 식은땀이 묻어났고 바들거리는 떨림이 느껴졌다. 상호는 입에서 손을 떼어내고 순수한 궁금증이 서려 천진난만하게 느껴지는 톤으로 물었다.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예요? 여기에 귀신이 있어요?”
“말하지 마, 티 내지 마. 조용히, 조용히 해….”
이휘성은 화들짝 놀라며 상호의 입을 더 강한 힘으로 막았다. 그렇지만 물리력으로는 그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없었다. 상호는 도리질해서 입막음을 떨쳐냈다.
“모래에 고개를 파묻어도 존재하던 건 사라지지 않아요. 눈을 떠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너도 □됐고 나도 □됐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해요. 다 놓아버리고 싶고 회피하고 싶을지라도 똑바로 받아들여야 적절한 대처가 가능하니까요.”
상호는 벅차오르는 희망의 예찬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사고의 결과물을 말하듯 논리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 태도가 이휘성을 분노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가 울음을 멈추고 상호의 멱살을 잡고 일어났다. 상호는 키가 컸지만, 이휘성은 2미터가 넘는 장신 중의 장신이라 발뒤꿈치가 들렸다.
“불시자(不視者)들은 다 그렇게 순진하게 말하지. 너는 뭘 바라길래 나한테 이러는 거지?”
“뭐가 형을 그렇게 겁먹게 했는지 알려주세요. 선배가 갑자기 이상해졌어요. 저는 이 현상을 해결할 실마리를 잡고 싶고 형이 그 단서를 쥐고 있다고 짐작하고 있어요.”
“그래?”
이휘성은 여상한 태도로 짤막하게 대답하곤 체육관을 둘러봤다. 그의 입가에 비웃는 미소가 걸렸다. 제정신에서 180도 돌면 또라이지만 여기서 다시 180도 돌아버리면 제정신이라는 농담이 있지 않던가. 이휘성의 상태가 딱 그래 보였다. 얼굴을 타고 흐른 눈물 가닥들이 반짝거렸다.
“그럼 죽어. 세면대에 물 채워놓고 얼굴을 박든, 절벽에서 뛰어내리든 그게 제일 깔끔하고 편하게 죽는 방법일 거니까.”
이휘성은 폭소를 터뜨리느라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는 과도한 공포로 인한 압박에 시달리다 못해 이성을 벗어던져 그로부터 해방되었다. 멈추지 않는 웃음은 발작으로 발전했다. 그는 사지를 뒤틀며 쓰러졌다. 상호는 몸을 잡아주려고 했으나 체격 차이가 커서 깔려버렸다. 소란을 듣고 뛰어온 전영중이 이휘성에게 깔린 상호를 끄집어내고 이휘성의 이름을 불렀다. 상호는 최후에 그의 시선이 향했던 곳을 쳐다봤다. 오늘은 날씨가 맑다고 했건만 창문을 통해 무채색 하늘이 보였다. 앞으로 몰아칠 폭풍우의 예고였고 공포물의 클리셰적인 오프닝을 장식하기에 적절한 풍경이었다.
기상호와 농구부원들은 체육관 밖에서 앉거나 벽에 등을 기대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단조로운 합숙 생활 중에 발생한 소란에 아이들은 예민하게 반응했고, 달려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인원이 체육관에 모였다. 덕분에 대처는 빨랐고 구급차를 부르고 병자의 몸에 옷가지를 덮어 체온을 유지시키는 기본적인 조치가 끝나자, 누군가 외친 밖으로 나가 예의를 지키자는 의견에 순순히 따랐다. 연습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만히 있자니 몸이 근질거려서 기다림이 길게 느껴졌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이현성 감독이 체육관 문을 열고 나왔다.
“이휘성이는 병원 잘 갔고, 니들도 놀랐을 텐데 고생 많았다. 니들이 빠릿하게 행동해서 구급차가 빨리 왔다. 잘했다.”
“그럼 들어가도 돼요?”
희찬이가 번쩍 손을 들고 질문했다.
“아니. 이것만 듣고 가라. 그래서 이휘성이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는데, 만약 얼굴 보면 금마가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은 말하지 마라. 자기가 모르는 일을 남이 말하고 다니는 건 꽤 불쾌하니까. 이상, 해산! 후딱 가서 몸 풀어라.”
이현성 감독은 간략하게 전달 사항 발표를 마쳤다. 농구부원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체육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호는 그들과 반대로 움직였다. 별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재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직감과 앞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가 숨기는 사실이 무엇일지 등등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서 얼굴에 시원한 물을 묻히고 싶기도 했다.
상호는 원중고 숙소방에서 나오는 윤경택 감독을 목격했다. 그는 어깨에 배낭을 비스듬히 메고 있었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복도가 조용하다 보니 상대가 하는 말까지 성기게 들렸다.
“휘성이가 따로 들고 온 짐이 쑥색 배낭이 맞을까요?”
-네. 네. 그걸 … 휘성이가 … 알아서 조치를 … 감사합니다.
상호는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을 들은 것 같아 윤경택 감독이 그를 발견하기 전에 숨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 기다란 복도에서는 몸을 숨길 곳도 없어서 까닥 인사하며 지나쳐 갔다. 그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며 생각했다. 재유가 노리던 건 귀신 보는 애가 아니라 그 애가 가진 물건이 아니었을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화장실에서 나가자마자 이리로 오는 재유와 마주쳤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상호를 보고 약간 놀랐다 곧 평정을 되찾았다. 재유는 상호를 끌어다 원중고 숙소방 문 앞에 세웠다.
“마침 잘 됐다. 니는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라.”
“뭐 하려고요?”
재유는 쉿, 짧게 공기 뱉는 소리를 냈다. 망꾼과 실행범, 정석적인 도둑 2인조였다. 재유의 태도는 차가워서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짓도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깐이면 된다.”
“햄 진짜 제정신이에요?”
“만약 누가 책임을 물으면 내가 협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햄이 찾는 게 이휘성 가방이에요? 그거 원중고 감독이 가지고 갔어요. 정신 좀 차려봐요, 제발.”
위기에 처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고, 상호는 여태껏 알아낸 사실을 종합해 선배의 절도를 저지할 수 있는 정보를 전달했다. 재유는 입이 턱이 빠질 듯이 떡 벌어졌다.
“그게 참말이가…?”
“네. 아마 구급차에 실어 보냈을 거예요.”
재유는 문을 열어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버드나무 가지로 가려졌지만,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쪽 발을 창틀에 걸쳤다. 상호는 재유의 허리를 끌어안고 창틀에서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미쳤어요? 진정해요!”
“이거 놔 봐라. 뛰어가면 따라잡을 수 있다. 2층에서 뛰어내린다고 안 죽고 안 다친다.”
“달리는 차를 뛰어서 쫓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서는 뭐라고 말할 건데요? 포기해요. 이미 저희가 어쩔 수 없는 물건이에요.”
하, 하하…. 망했다…. 진짜 망했네…. 상호가 직설적으로 꽂아 넣은 사태를 받아들인 재유는 멍하게 웃었다. 그는 몸을 가눌 의지도 상실했는지 흐느적 늘어져서 상호의 팔에 하중이 그대로 느껴졌다. 재유를 이대로 체육관까지 끌고 가게 생긴 상호도 눈물을 찔끔 흘리며 따라 웃었다.
상호는 휴대폰을 보고 있는 준수 근처를 기웃거렸다. 오기 시작하는 비가 토독거리며 유리창을 두들겼고, 오후인데도 짙은 먹구름이 해를 가려 체육관에 켜둔 전등이 더욱 환하게 느껴졌다. 짐승의 울부짖음인지 사람의 고함인지가 들린 것 같아 닭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두리번거렸다. 아까부터 환청처럼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워 있던 희찬이는 상호한테 괜히 준수햄 자극하지 말고 가만히 멍이나 때리고 있으라는 눈치를 줬다. 그렇지만 상호에게는 준수에게 알아봐야 하는 게 있었다. 재유에 대해 혹시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게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이건 다른 사람보다 재유와 제일 친한 준수에게 물어보는 게 효과적일 터였다.
그러면 왜 눈치만 보고 있냐 하면… 상호는 준수가 무서웠다. 감독님을 탈모로 인신공격할 수는 있어도 준수한테는 시□의 ㅅ자도 뱉을 수 없었다. 성준수는 농담으로도 성격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부당하게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비속어가 걸쭉하게 섞이긴 했어도 그의 분노와 비난은 오로지 사실에 기반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찾던 물건이 주인 따라 응급실로 가버렸다는 소식을 접한 뒤로 재유는 후 불면 부서져 흩어질 것 같은 버석한 상태가 되었다. 친한 친구 상태가 저러니 덩달아 준수도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다. 저런데 질문을 잘못 했다가 어떻게 될까? 상호는 ‘야 이 □발 새□야.’로 서두를 뗀 욕설을 쉬는 시간 내내 처먹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결국 준수가 참다못해 상호를 불렀다.
“기상호. 정신 사납게 얼쩡거리지 말고 말을 해.”
상호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희찬이를 쳐다봤다. 희찬이는 그를 외면했다. 준수의 미간이 점점 험상궂게 패이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는 잽싸게 그의 귀에 입을 데고 속닥거렸다.
“혹시 재유햄 오늘 말고도 이상한 행동 한 적 있었어요?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떠오르는 게 있나요?”
준수는 의외로 상호를 타박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하다 대답했다.
“글쎄다. 이 산골짜기에서 할 수 있는 게 운동 말고 뭐가 더 있다고. 아, 맞다. 시간 길게 나면 어딘가로 사라지긴 했어.”
“어디 갔는지 알아요?”
“아니. 근데 가는 방향 보면 1층 같았어. 거길 뒤져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햄….”
기상호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성준수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불쌍한 눈동자로 쳐다봤다. 준수는 한밤중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발견한 것처럼 질색했다.
“□발. 징그럽게 왜 그러냐?”
“절 어두운 그곳에 혼자 보내실 건가요?”
“왜 갑자기 지랄인데. 설마 무섭냐?”
“네.”
“진심이냐?”
준수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상호를 노려봤다. 상호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 만큼 큰 고등학생이 고작 음기 서린 건물을 대낮에 돌아다니는 걸 무서워한다는 건 부끄러운 노릇이었지만 거긴 특히 기분 나쁜 곳이었다. 밝아도 가기 꺼려지는데 지금은 비가 와서 어둡고 축축하기까지 했다. 상호는 절대 거길 혼자 가기 싫었다. 준수라면 귀신이 튀어나와도 푸짐한 욕 한 사발로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든든하기도 했다.
준수는 쏘아붙이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고 일어났다. 상호의 얼굴이 감격으로 밝아졌다.
“햄!”
“뭐. 가자면서. 놓고 간다?”
상호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준수의 뒤를 놓칠세라 쫓아갔다.
잠시 뒤 그들은 1층 복도에 도착했다. 상호는 준수 뒤에 숨어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준수는 이제 지적하고 싶지도 않은지 얼굴만 찌푸리고 말 뿐이었다. 그는 1층 복도의 방을 대강 살피고 복도 끝 방에 걸린 희한한 자물쇠를 살피다 참지 못하고 상호에게 쏘아붙였다.
“야. 오늘은 괜찮은데 오바 그만 떨지?”
“네? 여전히 기분 나쁜데요…. 특히 그 앞에서 뭔가 스멀스멀.”
준수는 상호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는 도로 상호를 무시하며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다가 빼냈다.
“햄이 자물쇠를 부쉈어…!”
“아오! 시□아! 부서져 있었다고!”
준수는 경악하는 상호에게 욕을 내뱉으며 자물쇠를 흔들었다. 줏대가 맥없이 덜렁거렸다. 그는 쌍시옷 발음을 내뱉으며 방문을 걷어찼다. 방이 활짝 열리면서 소름 끼치는 기운이 겨울철 히터로 난방한 교실의 공기처럼 훅 밀려 나왔다. 상호는 판도라도 저런 기개를 가지고 상자를 열었을지 궁금했다.
그의 선배는 척척 방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뒤졌다. 본인이야 쫄려도 별수 없으니 그냥 하는 거라는데 상호가 보기에는 겁대가리를 서울 어딘가에 유기해 놓고 부산으로 온 것 같았다. 앞서 보여준 반응으로 유추하자면 이 방에 진득하게 고인 사이함을 느끼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상호는 방 안으로 들어갈 깡은 없어서 문지방 앞에서 선반에 놓인 매트를 가리켰다.
“매트 사이에 뭐 꼈어요.”
준수는 매트에 팔을 집어넣고 뒤적거렸다. 그는 줄 이어폰과 MP3를 끄집어냈다. 상호가 아는 이 중 스마트폰에서 노래가 나오는 시대에 MP3까지 쓸 정도로 음악에 취미가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이거 재유 거네.”
준수는 줄 이어폰을 귀에 꽂아 노래를 듣고 확신했다. 그는 선반 옆에서 뭔가 발견했는지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상호에게 이리 와보라고 손짓했다. 상호 쪽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는 쪼개진 금줄 두른 독 주변에 검게 칠한 나무 상자가 부서져 있고 검은 가루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상호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주춤거리며 물러나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색이 전혀 다른데도 소금이 떠올랐다.
소금, 생명의 신경 신호 전달에 쓰이는 염화 나트륨 결정체. 예로부터 세균을 죽여 음식을 오래 보존하는 데 쓰인 식품, 그에 따라 상징성을 부여받아 귀신을 쫓는 데 쓰이는 물질. 그게 검게 변할 수 있는 거였나? 만화에서나 봤는데? 만화에서도 소금 종지에 소금을 쌓아놔도 그게 전부 시꺼메지지는 일은 드문데? 저 불길한 기운 폴폴 풍기는 게 부엌에도 있는 무해한 가루인 소금은 맞나?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일어나도 되는 일인가?
상호가 기이에 압도당해 아무 생각도 못 하고 있는 사이 준수는 가루를 만지작거리다가 조금 찍어 혀에 가져다 댔다.
“짜네. 이거 소금이다.”
“그걸 왜 먹어봐요!”
상호는 식겁했다. 준수는 한술 더 떠서 상자 파편을 손톱으로 긁어보기까지 했다. 검은 부분이 벗겨지면서 노란색 속지가 드러났다.
“새□가. 지가 처먹은 것도 아닌데 호들갑 작작 떨어라. 여튼 간에, 이건 부적 붙인 것 같다.”
그러니까 원래 노란 부적이 붙어있었는데 그게 검게 변해서 검은 칠을 한 것처럼 보였다는 소리다. 이어 붙이면 상당한 부피를 가지고 있었을 상자의 표면을 꼼꼼하게 덮고 있던 부적이 다 검게 변해서. 상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기 원래 뭐가 들어있었을까요?”
“뭐 대단한 귀신이라도 들어있었나 보지. …애가 이래서 상태가 맛이 갔나. 말이라도 하지. 이게 뭐라고.”
준수는 씁쓸해하며 잡동사니를 발로 쓸었다. 대단한 귀신이 들어있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상황이 연결되며 섬전 같은 통찰이 찾아왔다.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렸다.
“근데 준수햄…. 햄이 그랬잖아요. 여기 ‘오늘은’ 괜찮다고. 그러면 전에는 햄도 기분 나빴다는 거 아녜요? 그리고 그런 느낌이 오늘 갑자기 없어졌다면, 기분 나쁜 분위기를 자아내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거잖아요. 그게 저 상자가 깨져서 그런 거라면.”
어떤 앎은 무지보다 고통스러운 법이다. 상호는 겁먹은 표정으로 준수를 쳐다봤다.
“이 □끼는 뭔 소설을 구구절절 써?”
“오늘 이휘성 쓰러졌죠? 그 햄 귀신 보나 봐요. 그 햄이 우리 다 죽을 거라고 발광하다 쓰러졌어요. 재유햄도 절박하고 여유 없어 보였잖아요. 이게 다 그 상자에서 풀려난 귀신 때문이라면요? 여기 묘하게 지대가 기분 나쁘고 음기 넘쳤잖아요. 그게 다 그 귀신 때문이라면요? 그런 대단한 존재가 풀려났어요. 여기서.”
준수는 상호의 눈가에 맺힌 눈물과 일그러진 표정을 보더니 그의 팔목을 붙잡아 복도로 끌고 나왔다. 준수는 창문을 열려다 밖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작게 욕을 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오른쪽 끝까지 돌리고 손을 데 온도를 확인했다.
“기상호. 얼굴에 물이라도 끼얹어.”
상호는 순순히 찬물로 세수를 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듯한 찬물이 닿으니 소름 쭈뼛 돋게 하는 기운이 다소 가셨고 머리에 오른 열이 식는 것 같았다.
“진정됐어?”
“…네.”
“그래서 기상호. 지금 우리가 합숙 와서 사고 났어?”
“아니요.”
“다친 사람 있어?”
“없어요.”
“귀신 본 사람 있어?”
“이휘성이요.”
“…걔는 빼고. 아무튼 그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네?”
준수의 주장을 들으니 일리가 있었다. 아직은 높이 올라가는 롤러코스터처럼 평화로웠다. 갑자기 생난리를 쳤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준수가 고개를 숙인 상호를 꾸지람했다.
“사서 걱정을 왜 하냐?”
“죄송해요….”
“나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생각을 해보라는 거지. 일단 이휘성, 걔 나 있을 때는 해도 아주 멀쩡했어. 귀신 본다고? 지랄. 나는 2년 만에 갑자기 귀신 보게 됐다는 사람 못 봤다.”
“……그냥 햄이 주변에 관심이 없던 거 아닐까요?”
“다시 그딴 딴지 걸면 주둥이 찢어버린다.”
“넵.”
“나도 여기 기분 나빠.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 내일까지 있어야 하네? 여기서 네가 어쩔 수 있어? 토끼기라도 하게? 질질 짜면서 주변 분위기까지 잡쳐놓을까? 별수 없으면 그냥 하는 수밖에 없어. 만약 네가 걱정한 대로 귀신이 깽판을 치고 다닐 거라 해. 그런데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말하면 믿어주기는 할까? 미친놈 취급당하고 끝이겠지. 그럼 그냥 부딪힐 수밖에 없잖아.”
“그렇죠….”
상호는 바닥이 꺼져라 체념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도 그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기다리고 파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준수는 할 말이 다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찾는 건 그 아래 있는 사람의 몫이야. 감독님이 그랬지? 늘 생각하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머리를 굴려서 에이스를 긁어내는 게 네 몫이잖아. 그런 놈이 알아서 겁 집어먹고 질질 짜기 일보 직전이 되면 어떡하라는 거냐? 너 오늘은 추리 스페셜리스트라며. 진실을 찾아내겠다는 놈이 벌써 멘탈 나가도 돼?”
아. 그렇네? 상호는 작게 한탄했다. 준수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자각시켜도 가시지 않던 우울함이 싹 걷혔다. 앎은 무지보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복한 돼지가 아니라 불행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진실을 알아야 대처하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살장으로 무력하게 끌려가는 가축이 아니라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사람이다. 상호는 드디어 얄밉게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었다.
“아니요…. 당연히 아니죠. 오늘 컨셉은 역경에 굴하지 않는 『명탐정 캐릭터』니까요.”
“그래. 정신 차렸으면 됐다. 하여튼 너는 영향 심하게 받는 것 같으니 되도록 이 근처 오지 마라. 그리고 정말 위험했으면 그냥 창고에 방치해 놨겠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찝찝하면 돌아가서 점집이라도 찾아가 보던가.”
준수햄이 너무 영향을 안 받는 건 아닐까요? 이거 호러물 도입부 클리셰인데…. 상호는 정말 주둥이를 맞을까 봐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그는 남은 의문을 해소하는 데 집중했다. 중요한 점이 어긋나 있다는 걸 떠올렸다.
“저기, 햄. 재유햄 오늘 일어나서 바로 산 간 거 맞죠? 중간에 어디 들리거나 그럴 틈이 있었어요?”
“없었을걸?”
“그 전에 누가 나가든지 해서 깬 적 있어요?”
“없어.”
“그렇다면 상자 부서진 타이밍이 이상하지 않아요? 재유햄이 어제 깬 걸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는 상태 멀쩡했으니까 오늘 깼다고 가정을 할게요. 그렇다면 희찬이가 준수햄을 깨운 6시부터 전날 밤 12시 사이에 움직였다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요.”
“일단 내가 누가 나가서 중간에 깼는데 기억을 못 했거나 못 일어난 거라 치면…. 그래도 그 시간에 거길 간다는 게 이상하네. 진짜 뭐지?”
“굳이 이유를 만들어 보자면 MP3 가지러 간 게 아닐까요?”
“결국 그거 우리가 찾았잖아. 이건 재유가 여길 꾸준히 오니까 일부러 놓고 간 거야. 들고 다니기 귀찮아서. 그걸 굳이 새벽에 어두워서 앞도 보이지 않는데 기분 나쁜 장소에 가서 찾아오려 할까?”
“확실히 그렇죠. 그러면 전날 부순 게 될까요?”
“네가 말했잖아. 평소 같았으니 아닐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치 상자가 알아서 떨어진 것 같네요….”
“그러게. 상자에 발이 달렸을 리는 없는데. 근데 우리 쉬는 시간 다 지났다.”
상호는 아차 싶어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화면 액정은 지금이 약속된 쉬는 시간에서 5분 정도 지난 시간이라고 알려주었다. 준수가 화장실을 나가려다 뭔가 떠올랐는지 멈춰 섰다.
“아 맞다. 그리고 이건 네가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재유가 오늘 산에 가서 찾은 건 돌무덤이었어. 호식총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거기서 부서진 단지를 꺼내서 종이 쪼가리를 챙기더라? 뭐가 적혀있는지는 확인 못 했어.”
“그걸 왜 지금 알려줘요!”
“그럼 언제 알려주는데. 니가 울음보 터지기 일보 직전일 때? 아무튼 다른 사람들, 특히 어른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고. 난 간다.”
준수는 상호를 남겨놓고 먼저 달려 나갔고 충격적인 정보를 들은 상호는 약간 울상을 지으며 그 뒤를 전력으로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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