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재유 반복 잔혹사

[지상고+원중고]재유 반복 잔혹사-7

으어엌 2026. 5. 5. 23:23

재수가 없고 산만한 저녁 연습이었다. 다 같이 뭣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미끄러지거나 튕겨 나가는 공에 머리를 얻어맞아 쓰러지곤 했다. 합숙 내내 심심하면 기어 나와 스릴을 선사하던 벌레들도 자취를 감춰 더듬이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연습이 진행되는 내내 게임의 배경음악처럼 악악거리는 고함이 메아리쳤다.

“아이씨. 뭔 고라니가 저리 살 떨리게 우노. 기운도 참 좋다.”

태성이 구시렁거리며 뒷머리를 긁었다. 아마 그도 무서운 것이리라. 태성은 아무도 맞장구쳐주지 않자 멍하니 서있는 상호에게 괜히 버럭 성을 냈다.

“니는 그 평소에 하던 빙□같은 대꾸 엿 바꿔 먹었노! 마! 니까지 정신 놓고 뭐 하나!”

“왜 상호한테 그러냐? 님이나 잘 하셈!”

“아따, 거기! 조용히 해라. 기상호! 니는 정신 차리고! 니까지 집중을 못 하면 어떡하노.”

이현성 감독이 소리치자 다은과 태성은 입을 다물었다. 상호는 무대 쪽을 쳐다봤다. 아직도 안색이 희게 질린 재유가 배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그는 절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로 영 맥을 못 추더니 결국 저녁 연습 중에 극심한 복통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몰래 명치를 눌러 봤을 때 굉장히 아파했으니 위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이현성 감독이 다시 구급차를 부르려 했으나 본인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모두 모여있는 체육관에 눕혀놓게 되었다.

편히 있으라고 숙소방에 뉘어놓고 싶었지만 이휘성의 보호자로 구급차에 탄 서인진 코치가 돌아오지 못해 따라붙을 수 있는 어른이 없었고 혼자 두기에는 재유가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점이 걸렸다.

상호는 창밖을 내다봤다. 비가 오고 있었고,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장대비가 감옥 쇠창살을 연상시켰다. 준수와 함께 1층의 그 기분 나쁜 방에 갔다 온 뒤로 줄곧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어디서 받는지 모를 스트레스가 정신적 자원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순간 검은 털 뭉치가 창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창문은 꽤 높은 곳에 달려있어 동물이 지나다닌다 해도 보일 위치가 아니었다. 새가 날아다닌다기에는 비가 왔고 고양이라 해도 그 높이까지 기어오르기는 힘들었다.

저게 대체 뭘까? 상호는 연습 시간이라는 것도 까먹고 창문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때, 뭔가 불쑥 창문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사람과 흡사하지만, 흰자가 새빨간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체육관 안을 살폈다. 상호가 그와 정확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 그것은 눈가를 휘고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웃었다. 털이 검어 창문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웃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이가 빼곡히 박힌 잇몸이 드러났다. 미소는 과하게 친절했고 이빨은 살점을 찢기 적합하게 날카로웠다. 그것이 사람의 언어를 구사했다. 기ᄃᆞ리고 잇ᄉᆞ. ᄌᆞᆸ으러 갈게. 그것은 자지러지게 높은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눈앞이 마블링 기법처럼 일그러졌고 오금에 힘이 빠졌다.

뭔가 머리를 세게 쳤다. 깜깜해진 시야가 유성이 떨어진 듯 번쩍거렸다. 눈 앞이 개이자 체육관 천장이 보였고 큰 손바닥이 눈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님! 괜찮음? 죄송. 쓰러질 줄은 몰랐음.”

쓰러진 상호를 내려다보고 있던 다은이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상호는 무쇠 팬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픈 뒤통수를 매만졌다. 맞은 부위가 약간 부풀어 있었다. 저 형이 자기 팔뚝 굵기 생각 안 하고 남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 같았다.

이현성 감독은 나자빠진 상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다 윤경택 감독과 뭔가 상의하더니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 연습은 여기서 끝! 정리해라!”

“네? 벌써요?”

희찬이가 이의를 제기하자 이현성 감독은 엄지로 원중고 쪽을 가리켰다. 쓰러진 지국민 옆에서 땅을 두들기며 통곡하는 조재석을 우수진이 억지로 일으키고 있었다. 조재석은 지국민이 일어나자 도주를 시도했지만, 굴러가던 농구공에 발이 걸려 고꾸라지려는 걸 박교진이 잡아줬다.

“저기서 더 운동하면 사고 난다.”

“아. 그렇겠네요.”

희찬이는 그 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곤 대걸레를 가지러 움직였다. 상호는 희찬이를 따라가다 창문을 올려다봤다. 억수로 내리는 빗줄기 말고 보이는 건 없었다. 따가운 빗소리가 그가 환각을 들었다고 단정짓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오늘 겪었던 사건이 인상깊어서 일종의 최면처럼 저런 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괴담이 따지고 보면 다 그런 식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은이 대걸레를 가지러 가는 상호를 붙잡고 마치 공범을 확인하는 양 그만 들을 수 있는 성량으로 귓가에 소곤거렸다.

“님도 봤음?”

“뭐요?”

“눈 시뻘건 게 잡으러 갈 거라고 하는 거….”

다은이 손가락을 짐승의 발톱처럼 굽히는 시늉을 해보았다. 상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서로 다른 사람 둘이 같은 말을 하는 환각을 볼 확률이 얼마나 될까? 다은은 얼른 말을 덧붙이며 상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별일 아닐 거임. 귀신이 밖에 싸돌아다닌다고 누구 잡기라고 하겠음? 괜찮을 거임. 너무 걱정하지 마셈.”

그는 충격받은 것처럼 보이는 상호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걸 보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상호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의 자유분방한 사고가 명철한 이성과 결합하자 두뇌가 단계를 뛰어넘은 결론을 내렸다. 발광하던 이휘성의 단언은 참이었다. 이 기분 나쁜 곳은 밖에 돌아다니는 괴물을 가둬둔 감옥이었지만 그것이 풀려간 지금 언제 뜯겨나갈지 모르는 보호막이었다. 밖에서 들리는 고함은 분노보다 지나가는 꼬마를 겁주려고 왁 소리치는 질 나쁜 양아치의 행동과 비슷했다. 탈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피할 수 없는 끝이 100세 시대에 인생의 5분의 1도 살지 못한 자들에게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는 눈물을 닦아내고 어깨를 폈다. 그는 아마 죽을 것이다. 하지만 뭐라도 하면 누군가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건 농구에서 그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에이스를 집요하게 관찰하고 파악해서 공격을 완전히 막지 못해도 확실히 억제하는 것.

그리고 상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사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은 있었다. 그는 강당 쪽을 돌아봤다. 재유는 얕은 잠에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지만, 표정은 꿈속에서도 편하지 못하다는 듯 찡그린 채였다. 위염이든, 위경련이든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발병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다은처럼 다들 직접 그걸 보고도 사태 파악을 못 하는데 재유는 왜 신체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걸까?

겪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상호는 다은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늘 저녁 메뉴 중에 브로콜리랑 초장 있었죠? 햄. 저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어요?”

“있음. 뭘 해주면 됨?”

“일단 햄 몫으로 나온 초장 저 주세요.”

“…브로콜리는 초장이나 케첩 없으면 맛없는데.”

다은은 투덜거리면서 상호가 끄는 방향으로 같이 가주었다.


“재…. 일어……있…어? 들어…서 편하게….”

친근한 목소리가 혼곤한 의식 속에서 드문드문 들렸다. 5분만, 5분만 더…. 재유는 아무렇게나 웅얼거렸다. 재유가 일어나기는커녕 잠꼬대만 하자, 누군가 그를 마구 흔들고 두들겼다. 이제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서 밀고 당기는 대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뒤척일 힘도 없을 만큼 피곤했다. 건물이 무너져서 당장 도망쳐야 해도 그냥 깔려 죽고 싶을 정도로 움직이기 싫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재유를 깨우려 하던 누군가는 기상 알람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그를 귀찮게 하다 포기했는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다. 다시 의식이 끊어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등 밑으로 뭔가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뿌옇게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흐릿해도 잘생긴 얼굴이 부드럽게 말했다. 더 자도 돼. 재유는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준수가 허투루 하는 말은 없었다. 그가 더 자도 된다고 하는 건 지금이 아침 연습 시작하기도 전의 새벽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여기는 지상고 농구부 숙소가 아니었다. 재유는 눈을 번쩍 떴다. 높은 천장에 줄줄이 달려있는 갓 전등이 보였다. 여기가 어딘지 인식하자 있었던 일, 자신이 저지른 짓, 그래서 생긴 책임과 의무가 떠올랐다. 그는 튕겨 올라오듯 일어났다. 준수가 민첩하게 상체를 뒤로 젖히지 않았다면 서로 충돌할 뻔했다.

“아. 깼어? 놀라게 해서 미안.”

준수는 재유의 등과 오금 밑에 넣었던 팔을 빼며 사과했다. 그를 이불째 들어다 옮기려고 한 것 같았다. 재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준수 말고 사람이 없어 체육관은 고요했다. 도대체 얼마나 잔 거지?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그는 연습 중에는 휴대폰을 걷는다는 것도 까먹고 무의식적으로 늘 휴대폰을 놓는 자리인 오른편을 정신없이 더듬었다.

“폰 여기 있어.”

준수가 재유의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휴대폰 시계가 저녁 연습 끝나기 전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체육관에는 사람이 준수밖에 없었고 고함은 언제부턴가 그쳐 쏴아, 하고 시원하게 퍼붓는 빗소리가 들렸다. 습기 때문에 찐득해진 피부에 옷이 달라붙었다. 재유는 준수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노?”

“오늘 연습이 일찍 끝나서 다들 숙소 가서 처박혀 있던지 그럴걸?”

“연습이 일찍 끝나?”

“어. 애들이 단체로 어디 꼬라박고 그래서 사고 날 것 같다고 일찍 끝내시더라.”

아. 그렇다면 일단 다들 무사한 거구나. 재유는 안심이 되어 픽 웃음이 나왔다.

“그럼 니는 내 기다려 준 기가? 그걸 와 기다리고 있나. 확 깨워버리지. 니까지 못 쉬고 뭐 하는 짓이노.”

“깨워도 못 일어났잖아. 막 불러도 5분만, 5분만 거렸으면서. 나중 가서는 흔들어도 대꾸 안 하더라?”

“그러면 얼굴에 물 끼얹으면 된다. 아니면 이불을 확 빼거나.”

“뭔…. 야. 웃지 마. 뭐가 좋다고 웃어.”

“와 그러노. 웃으면 복이 온다.”

“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으니까…. 어휴…. 됐다. 그래. 실컷 웃어라, 웃어.”

준수는 정색했다가 실실 웃는 재유를 보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재유로서는 친구랑 실없는 농담이나 할 수 있다는 게 좋아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조재석 말마따나 부처님이 고하시길 세상에는 고통이 넘쳐난다는데 작은 일에도 웃어야 버틸 수 있지 않겠는가. 준수는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더니 자기 손바닥을 재유의 손 위에 엎었다.

“네 물건이잖아. 가져가.”

준수가 손을 치웠다. 재유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줄 이어폰에 돌돌 감긴 MP3가 놓여 있었다. 재유는 덜컥거렸다. 준수는 MP3로 자신은 재유가 한 짓을 알고 있음을 천명했다. 준수는 재유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려 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너 진짜 나한테 할 말 없어?”

재유는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아나도록 MP3를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MP3 들킨 것 정도로는 동요가 표정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준수는 유추와 고백의 차이를 알 만큼 영리했기에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친구가 솔직하게 털어놓기만을 원했다. 준수는 인내심을 가지로 기다렸으나, 재유가 영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눈을 치켜뜨고 무릎걸음으로 접근했다. 재유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준수가 중얼거렸다.

“저걸 확 잡아서 말할 때까지 탈탈 털어야….”

“하지 마라. 하지 말라고.”

“진짜 한 번만 털어보면 안 돼? 가방도 털어보면 백원짜리 동전이라도 튀어나오는데.”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해?”

준수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재유는 준수의 팔목을 잡고 흔들리지 않으려고 버텼다. 준수는 서슬 퍼런 기세를 뿜어내다가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재유와 눈이 마주치자, 맥이 풀렸는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풀었다.

“안 해. 막 흔들었다가 너 잡을 것 같아서.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겠다.”

준수는 먼저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내가 지금 배가 고픈가? 재유는 이제야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점검해 보았다. 아직도 위 벽에 구멍이 뚫릴 것처럼 속이 쓰렸고 기분 따라 몸도 쳐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 원인을 찾아보려고 고민하다가 우울감이 해일처럼 밀려와서 그만두었다. 그러니까 4쿼터 풀타임으로 경기를 뛸 때와 비슷했다. 고비를 넘기면 뛰어도 아무 느낌이 없어지는 때가 있는데, 이때 상태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 이 마법의 상태가 깨져버린다.

그는 우울감에 휩쓸려 삼켜지기 전에 다른 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지금 뭘 해야 하나? 일단 밥 먹고 싶지는 않았다. 속이 엄청나게 쓰렸는데, 약이라도 먹으려면 뭐라도 먹긴 해야 하겠지만 지금 음식물이 들어가면 전부 게워낼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대신 뭘 해야 할까. 지금은 뭘 하긴 늦었긴 했다. 저것이 밖에 대놓고 돌아다니셔 밖에 나갈 수도 없고….

재유는 이전에는 이쯤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떠올리다가 자기가 뭘 놓쳤지 깨달았다.

그는 다급히 준수를 불렀다.

“감독님이랑 코치님은 어디 계시노?”

“코치님은 병원 갔잖아. 감독님은 두 분 모두 비 많이 와서 주변 돌아보고 온다고 하셨어.”

준수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재유는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이 발목에 감겨 크게 넘어졌지만,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늘 저녁이 되면 감독님과 코치님은 산사태 때문에 주변을 둘러보겠다고 외출했다. 코치님이 빠진 상태에서도 감독님들끼리 나갔다면, 그게 체육관 주변을 맴돌며 소리 지르다가 사라졌다면.

계단을 세 개씩 뛰어 내려가며 정문으로 전력질 주했다. 정문 근처에는 우수진과 희찬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재유는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희찬이가 재유를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어? 재유햄? 몸은 괜찮아요?”

“감독님들은 어디 갔노?”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걱정이에요. 근처 점검하시겠다고 좀 전에 나가버렸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형도 이상한 거 봐서 말리러 오신 거예요? 오늘 연습 중에 계속 눈 붉은 귀신같은 게 보였는데 감독님들이 산사태 날 수도 있으니 주변을 살펴봐야 한다고 하셔서 나가게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설득하려 했는데…. 어…. 죄송해요…….”

우수진은 재유를 보고 반가워하며 주절주절 상황설명을 하다 어물거리며 사과했다. 재유는 정문 밖 어둠을 노려보다 치미는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계단에 주저앉아 머리를 짚었다. 희찬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표정이 장난 아닌데요? 방으로 데려다 드려요?”

재유는 당황스러워하는 희찬이를 쳐다봤다. 눈이 태업하는지 후배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그는 인상 찌푸려가며 눈에 힘을 주려다 포기하고 희찬이와 우수진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누가 후다닥 뛰어가는 기척이 들렸지만, 초점이 안 맞아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여 어느 학교인지도 보지 못했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방에 가서 가만히 누워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일어나면 오늘 아침 5시 이불 위길 바랐다.

재유는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불을 켰다. 쌓아둔 이불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다은이 쓰러져 있었다. 머리에 붉은색 웅덩이가 생겨 있었다. 재유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투명한 손아귀에 붙들린 것처럼 오도카니 서 있었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충격이 정신을 난타했다.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아서 기어갔다. 사람 맥박이 제일 잘 느껴지는 게 손목이었던가, 턱 밑이었던가?

그때, 다은이 일어나서 정좌하더니 머리를 땅에 박았다.

“죄송합니다.”

재유는 시체가 관짝 열고 뛰쳐나오다 못해 발견한 사람한테 머리를 박는 이 정신 혼미한 상황 때문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입을 헤 벌렸다. 다은은 이마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장롱 문을 열어젖혔다.

“님! 눈치껏 나오셈.”

옷장 안에는 상호가 있었다. 그는 문에 기대고 있었는지 굴러떨어질 뻔했지만, 척추기립근 힘으로 버텼다. 상호는 순순히 장롱에서 나오려고 했으나,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리자 187센티짜리 고등학생의 몸무게를 버티지 못한 장롱 어딘가에서 우지끈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은은 상호를 잡아 와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유의 앞에 정좌시킨 뒤 재차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기상호, 니가 설명하셈.”

다은이 상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상호는 어버버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재유햄이 오늘 너무 이상해서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반응 실험을 한 건데….”

상호는 재유가 여전히 총기 없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자 언어적인 소통을 포기하고 피 웅덩이로 보이는 것을 검지로 훑더니 자신의 혀끝에 찍고 입맛을 다셨다.

“저거 물 탄 초장이라고요. 딱 봐도 티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게 내를 떠본 거다?”

“네.”

재유는 허탈해져서 헛웃음을 흘렸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피 웅덩이처럼 보였던 것은 왜 피로 착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묽었고 색도 선홍색으로, 진짜와 확연히 달랐다. 방에도 비린내 대신 새콤매콤한 냄새가 났다.

“상호야. 장난은 당하는 사람이 웃어넘길 수 있어야 장난이다. 다음부터는 당하는 사람 기분이 어떨지 생각하고 장난을 쳐라.”

재유는 허허 웃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은이 무사하다는 게 너무 안심되어 그들의 선 넘는 장난 정도야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다은은 걸레를 가져오겠다며 화장실에 갔다. 재유는 베개를 꺼내려 가다가 시선이 느껴져 그쪽을 쳐다봤다. 상호는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주의 깊게 재유를 관찰하고 있었다. 상호가 일어나서 재유를 단단히 붙잡았다. 냉혈한 사백안이 재유를 내려다봤다. 그가 입을 여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입을 틀어막고 싶었는데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햄. 햄은 왜 그렇게 놀랐어요?”

상호는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시선으로 사람을 못 박아 버리려는 듯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재유는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왜냐니…. 누구나 그런 거 보면 놀란다.”

“피라고 만든 거 보세요. 주황빛이 돌잖아요. 다은햄 대놓고 가슴 오르락내리락했고요. 저는 아무리 그래도 햄이 바로 알아차리고 장난치지 말라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 예상 밖으로 놀라시더라고요.”

상호는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거 말고 수상한 건 더 있어요. 1층 창고에 상자 부서져 있던데 그거 재유햄이 한 거 맞죠? 그런데 그거 도대체 언제 깨 먹었어요? 어제까지 햄은 멀쩡했으니, 상자가 어제 취침시간부터 재유햄 기상 시간 사이에 깨졌다고 가정해 볼게요. 그런데, 새벽에 거길 왜 가요? 무엇보다 자는 사람 중에 누가 나가서 깬 사람이 희찬이 말고는 없고요.”

재유는 이때만큼 후배의 명석한 머리가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손바닥이 귓가로 올라갔다. 대걸레를 들고 돌아온 다은은 재유의 표정을 보더니 걸레는 내팽개치고 상호를 붙잡아 재유에게 떨어뜨렸다.

“적당히 해.”

“제 주장의 근거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헛소리나 다름없는 건 알아요. 하지만 재유햄의 반응이 증거잖아요! 왜 억장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건데요? 귀 막지 마요!”

상호는 몸을 비틀어서 다은의 팔에서 벗어났고, 재유의 팔목을 낚아채 손바닥을 귀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다은은 상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버둥거리며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밖에 돌아다니는 건 뭐예요? 말해줘요! 제발, 도와줘요! 알고 있잖아요! 누구라도 살려 보내야 할 거 아냐!”

재유는 귀를 틀어막았지만 다은에게 붙들린 채로 몸을 비틀며 악을 쓰는 상호의 말은 똑똑히 들렸다. 재유는 후배의 목소리 대신 머릿속을 울리는 이명에 의식을 집중했다. 의문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대체 왜 다들 안온한 무지 속에 있지 않고 알고 싶어할까? 왜 자기 무덤을 못 파서 안달인 걸까? 준수는 그러다 죽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모양이었다. 등에 뭔가 닿았다. 고개를 들어 누구와 부딪혔는지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이 커졌고, 눈앞이 만화경을 들여다본 것처럼 일그러졌다.

잠시 뒤, 재유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반복적으로 쓸어내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몸통에 펴졌다. 점차 이명이 잦아들며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고 시야가 트이면서 방바닥이 보였다. 머리 위로 뭔가 덮였는지 비치는 빛이 파르스름했다. 웅크린 몸을 피면서 지상고 신 저지를 걷어내면 숙소 방이 보였다. 초장 물 위로 대걸레가 대충 덮여있었고 장롱은 닫혀있었지만 어딘가 주저앉았는지 문이 삐뚤어져 있었다.

재유는 곁에서 그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는 준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준수는 재유에게 해명도,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현기가 느껴지는 검푸른 눈동자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재유는 준수가 이번에도 원인을 향해 돌진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늘 그런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잡으면 잡혀줄 것처럼 재유의 곁에 있어주었다. 재유는 친구의 손을 꽉 붙잡았다.

“니는… 무슨 일 생기면 여쭙잖게 남 챙긴다고 하지 말고… 괜히 덤비지 말고 니 목숨부터 건사해야 한다…. 알았지?”

“어. 알겠어. 그럴게, 그럴게. 꼭 그렇게 할게.”

준수는 순순히 대답했다. 하지만 재유는 준수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