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재유 반복 잔혹사

[지상고+원중고]재유 반복 잔혹사-5

으어엌 2026. 5. 5. 23:05

재유는 팔을 문지르면서 이부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너무 추워서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정신은 얼음장 같은 계곡물 온도를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뇌와 신체의 상태는 초기화되어 괴리를 일으켰다. 폐에 들어있지도 않은 물을 배출하려고 기침이 연거푸 나왔다. 환상통처럼 어디 맞은 데도 없는 뒤통수가 욱신거렸다. 지금이 몇 시지? 충전기 줄을 잡아당겨서 휴대폰을 찾았다. 액정에 뜨는 시간은 6시 남짓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 어느 새□야? 준수가 뒤척거리다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미안타. 침을 잘못 삼켜서 사레들렸다. 재유는 기침 나오는 걸 간신히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아…. 재유 너야? 괜찮아? 내는 괜찮으니까 얼릉 자라. 재유는 준수 등에 깔린 이불을 빼서 배기지 않게 잘 덮어주었다. 준수는 비몽사몽 했는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다 도로 잠들었다. 재유는 준수가 움찔거리다가 곤히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준수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찔러보았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꿍얼거리는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유는 추울까 챙겨온 긴 바지로 갈아입은 후 저지를 걸치고 나갔다. 그는 문을 닫을 때까지 숙소 방이 고요하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유는 산책길을 따라 산을 타서 어제 갔던 호식총에 다시 갔다. 갓 동이 튼 산길은 가로등도 없고 햇빛을 갈망하는 나무들이 하늘로 잎을 뻗어 침침했지만, 돌무덤 상태를 확인할 정도는 되었다. 무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했다. 그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그 짓을 다시 해야 한다니. 독을 깨고 호환귀한테 쫓기는 일을 다시 겪어야 한다니. 이번에는 단지를 어디 절벽이나 비탈에다 멀리 던져버리거나 도망치기 좋은 곳에서 깨버리든지 해야지.

재유는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얹혀 있던 떡시루를 쥐고 돌무덤을 항해 휘둘렀다. 돌이 시원하게 무너져 내렸다. 손에 묻은 녹가루를 바지에 문질러 닦고 무더기를 뒤졌다. 돌이 둥글게 쌓인 가운데 깨진 항아리 파편과 누런 편지 봉투가 보였다. 놀랍게도 독은 깨져있는 상태였다. 허탈해서 평평한 자리에 앉아 위를 올려다봤다. 호환귀 상자도 시간이 돌려져도 깨진 그대로였는데 왜 이것도 깨져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을까.

저번에 펼쳐보지도 못했던 봉투를 뜯어보았다. 안에는 편지와 그림이 들어있었는데, 편지는 한글로만 쓰여있어서 읽을 만했다. 대충 후대에 나타난 영험한 무당에게 선대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 주십사 하는 내용이었다. 재유는 내용을 이해하고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뻔했지만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해 편지를 반으로만 찢고 저지 주머니에 되는대로 구겨 넣었다. 단서를 휴지 쪼가리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같이 들어있던 그림은 지도였다. 점이 세 개 찍혀있었는데 정황상 다른 무덤들 위치 같았다. 지도는 혹시 몰라 사진으로 찍어둔 뒤 고이 접어서 챙겼다.

지도의 지형을 요래조래 휴대폰으로 검색한 이 근방 지도와 맞춰보고 제일 가까운 지점으로 이동했다. 기왕 왔는데 진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조선시대의 측량 기술은 아무래도 현대만은 못했으며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400 후의 지리는 어떻겠는가? 분명 맞게 찾아왔는데 아무것도 없었고, 그 근방을 풀숲을 해치며 꼼꼼히 뒤져야 했다.

그렇게 헤맨 끝에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형성에 사람의 힘이 개입됐음이 분명한 돌무지를 나무뿌리가 감싸고 있었다. 뿌리의 주인 되는 나무는 벼락을 맞기라도 했는지 옆으로 넘어져 있었는데 그리 된지 시간이 오래 흘렀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분해되어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돌을 헤집었다. 아까 본 거랑 재질이 똑같은 도자기 파편 조각이 나왔다. 까맣게 탄 줄기에서 자라나는 잎사귀를 뜯어서 주변 나무들과 비교해보았다. 비슷한 잎을 가진 나무가 이 주변에 몇 개 보였다. 무덤 근처에 심었다는 대추나무가 번성한 걸까? 그렇다면 독이 부서진 것도 이해가 갔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양기 강하기로 유명했다. 옛날에 할머니가 벽조목 비녀를 하고 다니신 적이 있어서 알았다. 전승은 세 마리라는데 달고 다니는 창귀는 아무리 봐도 두 마리라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하나가 이미 부서진 상태였을 줄이야.

맑은 하늘에 해가 떠 있으니 빛 안 비치는 산속이라도 찜기처럼 더위가 올라왔고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팠다. 분해되지 않은 낙엽 쌓인 바닥에 앉았다. 오후에는 비가 오니 또 푹 젖은 쥐새끼 꼴이 되지 않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했지만, 여름철 열어놓은 정문을 가린 대나무 발처럼 햇빛을 가려 주는 수림 밑에 있으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뒤에서 잔가지가 부서지며 바스락거렸다.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재유는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멧돼지보다 무서운 열 받은 준수가 심호흡하면서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재유는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준수는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고 고함쳤다.

“시끄러워! 귀신 봤냐?!”

재유는 그 박력에 자기도 모르게 합 입을 다물었다. 준수는 뒤로 슬슬 물러나는 재유의 양어깨를 멱살 대신 꽉 움켜쥐었다. 눈빛이 용광로처럼 이글거렸다. 재유는 너무 당황해서 머리가 하얘질 지경이었다. 준수가 따라왔다. 아마 체육 시설에서부터. 그가 했던 행동 전부를 목격했을 것이다. 준수가 으름장 놓듯 물었다.

“그래서, 아침 댓바람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너 하는 거 다 봤어.”

재유는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준수는 재유를 빤히 쳐다보다 기습적으로 그의 저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휘적거렸다. 편지랑 지도를 들키지 않으려고 씨름하다 경사 따라 흙바닥을 굴러갔다. 그 꼴을 보더니 준수는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더니 그를 일으켜 세워주고 묻은 낙엽을 털어주었다. 준수는 자신의 저지 주머니를 탈탈 털어 에너지바 두 개를 꺼내 하나를 재유 손바닥에 얹어주었다.

“이거라도 먹어. 이게 우리 아침밥이다.”

준수는 에너지바를 바로 뜯어서 전투적으로 씹어먹었다. 군것질거리를 보니 뒤늦게 허기가 느껴졌다. 준수에 대한 죄책감도 밀려왔다. 그의 행동 때문에 친구가 밥도 못 먹고 아침부터 고생했다.

“미안….”

“됐어. 미안하면 대답이나 솔직하게 해주던가.”

재유는 대답 대신 에너지바 봉지를 까서 입에 집어넣었다. 준수는 재유가 말이 없자 알아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잘 자고 있는데 정희찬이 놀래서 날 깨우더라. 네가 나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화장실 가는 게 아닌 것 같다고,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더라. 내가 따라가 볼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 했지. 나는 얼마 안 걸릴 줄 알았거든? 그런데 산으로 갈 줄은 누가 알았겠냐? 나도 그때는 놀랐다. 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당장이라도 불러세워야 하나 했는데 그랬다가 너 튀면 나는 못 잡으니까 최대한 조용히 거리 유지하면서 따라갔지. 그러다가 너 하는 짓도 보게 된 거고. 그래서 재유 너 왜 그러냐? 너 오늘 되게 이상해. 자고 일어났더니 눈도 뒤진 생선이 되어버렸고 기세도 형형하고 갑자기 안 하던 짓도 하고. 우리가 있는 일 다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는 아닌데, 그냥 눈 딱 감고 네가 왜 그러는지 알려주면 안 되냐? 또 몰라.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

준수는 고개를 떨궜다. 그는 무심하게 말하려 했지만 재유는 행간에서 묻어나는 조급함과 간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준수는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떨림을 감추려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차마 친구한테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친구를 다시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없었다. 준수는 언제나 위험을 피해갈 수 없으면 두렵다 해도 덤벼들고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진실을 알리면 계란으로 바위를 망설임 없이 내려치겠지. 혀로 살살 에너지바를 굴렸다. 달콤한 초콜릿과 캐러멜이 녹으면서 드러난 땅콩 조각이 입천장을 굴러다녔다. 한참의 침묵 뒤에 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농구부 한창 답 없을 때 내가 네 앞에서 질질 짜기도 하고 별꼴 다 보였잖아. 당연히 내가 아무리 울고 짜고 지□을 해도 그 답 없는 □발 새□들이 갑자기 성실해지고 연습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농구를 잘하게 되는 기적은 벌어지지 않아. 하지만,”

준수는 고개를 들어 재유의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 곧은 시선에 느껴지는 건 친구에게 조금의 위안이나마 전달하고 싶은 순수한 염려뿐이었다.

“털어놓으면 후련해지고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위로가 돼. 너는 고민을 알아서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면 언제든지 말해. 기다리고 있을게.”

재유는 뜨거운 게 울컥 치솟는 느낌에 헛웃음도 흘리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준수가 일어나서 엉덩이를 털었다.

“가자. 점심은 먹어야지. 오늘 점심 메뉴 뭐였냐?”

“삼계탕이랑 화채다. 비 오기 전에 빨리 가자.”

준수는 재유를 흘끗 봤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니 폰 가져왔나? 지도를 봐야 하는데 내 폰은 데이터가 다 됐다.”

“갖고 왔는데, 잠시만.”

준수가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꾹 눌러 켰지만, 폰은 바닥난 배터리를 드러내고 곧 픽 꺼져버렸다. 그는 당황해서 연거푸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방전된 휴대폰은 다시 켜지지 않았다. □발…. 준수가 욕을 내뱉었다.


기상호는 형들 눈치를 보면서 닭가슴살을 젓가락으로 뜯어내고 있었다. 다은도 태성도 아무 말 없이 입에 음식을 꾸역꾸역 쑤셔 넣고 있었다. 상호는 새삼스럽게 그 둘의 얼굴과 몸집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무섭다는 걸 깨달았다. 상호는 희찬이와 시선을 교환했다. 희찬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상호는 울상을 지었다. 여기에는 화를 내서 분위기를 잡을 준수도, 애들 다독여서 분위기 풀어줄 재유도 없었다. 아니, 그 두 사람이 이 시베리아 벌판보다 차가운 분위기의 주범들이었다.

기승전결은 이러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재유와 준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먼저 일어나서 어디 나갔다고만 생각해서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희찬이가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길래 넌지시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희찬이는 상호만 복도로 데리고 나가서 진실을 털어놓았다. 새벽에 재유 햄이 밖으로 나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화장실 가려는 것 같지 않아 일단 준수 햄을 깨웠다. 준수 햄은 자기가 따라가서 잡아 오겠다고 했는데, 지금 8시가 다 돼가는데도 소식이 없다는 거였다. 상호는 둘이 몇 시에 나갔냐고 물어봤다. 희찬이는 자기가 일어나서 확인한 시간이 6시 반 4분 전이라고 했다. 상호는 당장 그를 데리고 어른들 방으로 가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들을 맞이한 이현성 감독은 희찬이의 자진 납세 내역을 듣고 마른세수를 반복하며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어른들에게 재깍 말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이현성 감독은 아이들 방에 들려 상황을 전달하고, 일단 체육시설 건물을 뒤져 준수나 재유가 건물 안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 뒤, 무단탈주범들과 연락해서 무사한지, 어디 있는지 물어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재유야 전화하든 문자하든 답이 없었지만 준수는 연락 세례에 대한 응답으로 단톡방에 메시지를 하나 띡 남겼다.

 

-지금 산길인데 재유 미행하고 있어요. 뭐 하는지만 확인하고 데려올게요. 괜찮을 거예요. 폰 배터리가 빨리 닳아서 좀 있다 꺼둘게요.

 

이현성 감독의 미간 주름이 깊게 패였다. 이마가 더 넓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준수나 재유나 무사가 확인됐기 때문에 당장 경찰이나 구조대에 신고하지는 않았고 아침 연습도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안 그래도 전체 부원이 6명인 작은 농구부인데, 두 명이나 없어지니 엄청 썰렁했다. 상호는 선배가 없어졌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굴러가는 일상에서 관성의 법칙을 느꼈다. 준수와의 연락도 어느 시점으로 끊겨 결국 서인진 코치가 구조대에 신고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밥때가 되었고, 모두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낄 때까지 재유와 준수가 돌아오지 않아 밥상머리 분위기가 시궁창이 된 것이었다.

“와…. 여기는 사람이라도 죽었어? 왜 이렇게 초상집 분위기야?”

식판을 들고 가던 조재석이 기겁했다. 그는 금방 지상고의 인원수가 적다는 걸 알아차렸다.

“너희 3학년 선배들 아직 안 돌아왔어?”

“ㅇㅇ. 그 햄들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음.”

“준수 형은 몰라도 재유 형은 사고 안 칠 사람 같았는데…. 괜찮을 거야. 동네 뒷산인데 별일 있겠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무사할 거야.”

조재석이 환한 미소를 지었고, 울상을 짓고 있던 희찬이도 살짝 웃었다. 상호는 그 동네 뒷산이 태백산맥의 가지랑 연결된 울창한 숲이란 사실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렇게 삼림이 조성되어 있으면 사냥꾼이 총을 들고 돌아다니며 덫을 놓기도 한다는 점 또한 말이다. 그는 그 정도로 사회성이 없지 않았다.

조재석이 우수진과 자기 자리로 간 뒤에는 다시 숟가락과 젓가락이 급식판과 부딪히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결국 참다못한 다은이 금단의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니들은 재유햄이 왜 그랬다고 생각함?”

“빙□아. 밥맛 떨어지게 그 얘기를 지금 해야 되겠냐.”

“걱정 마셈. 분위기는 니가 다 □창 내놔서 더 박살 나고 자시고 할 게 없음. 하루 종일 의식하면서 입 꾹 다물고 있을 거임? 이게 뭐 하는 짓임? 볼드□트임? 말을 못 하게?”

“아니 그…. 안 좋은 생각 해서 산 갔을 수도 있는데 그걸 굳이 입 밖에 내야겠냐는 거지.”

태성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목소리를 특히 더 낮춰 말했다. 다은은 문장에 깔린 의미를 이해하고 태성을 면박을 줬다.

“빡대가리야. 목 위에 달린 게 머리카락 키우는 화분이 아니면 생각을 해. 재유햄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데? 대회 우승해서 실적 생겼고 경기에서 활약해서 소문나서 이제는 입시 문제 딱히 없는 거 아님? 그런데 왜 살자리버스 하겠다고 산을 탐?”

“그거 말고도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상호는 어제 재유의 상태가 어땠는지 떠올린 뒤에 논쟁에 끼어들었다. 그의 선배는 어제까지만 해도 강한 스트레스나 불안을 내비치지 않았고 사람의 상태가 이 와이파이도 제대로 안 터지는 산구석 합숙소에서 하룻밤 만에 바뀔 리는 없었다.

“다은햄 주장이 맞아요. 태성햄 말처럼 입시 말고도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분명 어제까지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였던 사람이 갑자기요? 개연성이 없잖아요.”

“기상호가 보는 눈은 정확하니까 재유햄 상태는 멀쩡한 게 맞음. 공태성 이 등□아.”

“아니 근데 그때 재유햄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니까요? 숨이 턱 막히는 게 딴사람이 된 것 같고….”

희찬이가 어물거리며 반발했다. 상호가 질문했다.

“어떻게 이상했는데?”

“어떻게라니. 뒤지게 쫄렸다니까. 무서웠다고.”

“님 기가 허해진 거 아님? 재유햄이 왜 쫄림? 삼계탕 남기지 말고 먹으셈. 인삼 줄까?”

“그 쓴 걸 왜 줘요!”

희찬이는 다은이가 들이미는 인삼 조각을 피해 국그릇을 사수했다. 희찬이의 주장을 듣고 뭔가 고민하던 태성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희찬이 니가 그랬지. 재유햄이 이상했다고. 그리고 상호가 재유햄이 어제까지는 분명 멀쩡하다고 했지. 둘 말이 맞다 치면, 자고 일어나 봤더니 재유햄 상태가 그리 되어버렸다는 소리다. 이게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나? 연습에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재유햄이 무단으로 이탈해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이게 사람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면 귀신의 짓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와. 선배를 귀신들린 놈으로 만드는 공태성 인성. 개소리할 거면 혼자만 똘갱이가 될 것이지 형도 끌고 가는 물귀신 정신.”

다은이 감탄하며 짝짝 손뼉을 쳤다.

“니는 왜 □랄이고. 고만해라 □신아. 그래서 나만 여기 음산하다고 생각하나? 그냥 산이라 그렇다 치기에는 기분 나쁜 구석이 있다.”

“좀 그렇긴 한데 그게 귀신이랑 뭔 상관임? 귀신 튀어나올 것 같다고?”

“내 말이 그거다. 사실… 어제 체육관 뒷정리하다가 부적 붙어있는 걸 봤다. 이거 백퍼 뭐 있는 거 아이가.”

태성의 말은 마치 한밤중에 촛불 켜놓고 읊는 괴담처럼 작고 나직했다. 솔직히 상호는 건물주가 미신을 믿는구나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관찰하고 판단한 것만 믿었다. 태성의 주장대로 여기는 무섭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지만 이건 낯선 곳에 왔기 때문에 느껴지는 이질감이며 태성이 건물의 분위기와 재유의 이상행동을 연관 짓는 것도 부적으로 촉발된 심상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시답잖아 보이는 추측으로 갑을론박을 벌이고 있을 때, 이현성 감독이 식당으로 들어와 그 옆에 앉았다.

“밥도 안 묵고 무슨 이야기를 그리 열심히 하노?”

“공태성이 짖어요.”

다은이 태성을 손가락질했고 태성이 다은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드잡이가 벌어지는 통에 희찬이는 이현성 감독에게 자초지종을 간추려서 들려주었다. 의외로 이현성 감독의 반응은 덤덤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래도 본인 앞에서 말하진 마라.”

“네?”

“재유랑 준수, 찾았다.”

이현성 감독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희찬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햄들은 무사해요?”

“그럼. 아주 멀쩡하지. 어쩌다 거기까지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길에서 한참 벗어난 숲에서 찾았다 캤다. 구조대원들한테 혼나고 코치님한테도 혼나는 중인데 내가 애들 밥 먹이는 게 우선이라 했으니 곧 식당 올 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태성이 투덜거렸다.

“그 햄들은 당최 왜 그랬대요?”

“그게 미심쩍어서 말이지. 재유가 일찍 깬 김에 조깅 나갔다 길을 잃어서 그리된 거라고 주장을 하는데 준수가 거기 장단을 맞춰 준다.”

“네? 거짓말이잖아요!”

희찬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져서 큰 소리를 냈다. 이현성 감독이 입에 검지를 댔다.

“진정해라. 내도 재유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금마 성격에 입을 다물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절대 말하지 않을 거고 짐작 가는 점도 없다. 혹시 느그들은 떠오르는 게 있나?”

상호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부원들도 피차일반이었다. 이현성은 잠시 고민했다.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 오늘 하루는 되도록 재유를 혼자 놔두지 말아 줄 수 있나? 금마가 또 돌발행동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그렇다. 그리고 고민은 어른보다 또래한테 털어놓기 쉽지 않나. 알아봐 주면 좋지만, 재유를 잡거나 니들이 수고를 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일단 재유햄을 감시하면 된다는 거죠? 뭔가 추리소설에서 용의자 감시하는 것 같네요….”

희찬이가 중얼거렸고 다은은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기며 상호를 쳐다봤다.

“님! 님이 활약할 시간임.”

“네? 저요?”

“ㅇㅇ.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비밀을 밝혀내는 『명탐정 기상호』가 될 때임.”

상호는 다은이 하는 농담을 알아듣고 실눈을 뜨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안경을 올리듯 콧등을 검지로 짚었다.

“큭…. 그 이름이 불리는 것도 오랜만인데….”

“뭐 하노, □시야.”

상호는 허리를 곧게 편 뒤 바지주머니에 한 손을 꽂고 박력 있게 정면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어려졌어도 두뇌는 그대로! 진실은 언제나 하나! 고등학생 탐정 기상호, 진실을 밝혀내겠습니다!”

“오오오. 기상호. 추리 스페셜리스트.”

이런 짓을 하면 희찬이는 한심해했지만, 이번만큼은 영혼 없는 호응을 보냈다.

“추리 스페셜리스트?”

“니 관찰력 좋지 않나. 그걸 농구가 아니라 추리에 쓰면 추리 스페셜리스트지. 니는 그리될 수 있다.”

희찬이가 밝게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들었다. 상호는 약간 감동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시늉을 했다.

“희차이….”

지상고 패트와 매트의 생쇼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이현성 감독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아들아. 정리 끝났제? 잘 부탁한다. 재유 너무 괴롭히지 말고.”

“네!”

상호는 힘차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담긴 의욕이 이현성의 불안을 고조시킨다는 것은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