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재유 반복 잔혹사

[지상고+원중고]재유 반복 잔혹사-4

으어엌 2026. 5. 5. 23:03
  • 캐릭터가 부상을 입습니다.

“와…. 여기는 사람이라도 죽었어? 왜 이렇게 초상집 분위기야?”

조재석이 식판을 들고 가다 기겁했다. 급식실에 모여 앉은 지상고 농구부는 삼계탕에 수박 화채라는 호화로운 메뉴를 앞에 두고도 침울했다. 밥상머리 앞에서 밥맛 떨어지게 뭐 하냐고 성질낼 사람은 제일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전투적으로 닭고기를 찢어발기면서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재유햄이 갑자기 이상해졌어요….”

풀 죽은 상호가 꿍얼거리듯 말했다.

“재유 형이 왜?”

조재석은 이상해하면서 자연스럽게 정희찬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있는 지상고 농구부원은 총 5명이었다. 한 명이 없었다. 진재유는 쌍용기 우승이라는 엄청난 실적을 낸 지상고 농구부원 중에서도 실력이 돋보이는 선수였다. 개인적인 점에 대해 아는 거라곤 조용하고 정말 숫기 없는 형이라는 점밖에 없었지만 괜히 밥도 거르면서 팀원들을 걱정시킬 유형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조재석 나름의 빅데이터로는 얌전한 사람들이 돌아버리면 더 무서울 때가 있었다. 예시로는 우수진이라든지. 이휘성이라든지.

“그게 좀 설명이 필요한데 말해도 되죠?”

정희찬이 동의를 구하듯 선배들을 쳐다봤다. 제일 짬 많이 찬 준수가 고개를 끄덕여서 정희찬은 암묵적인 허락을 받았다 여기고 주절주절 있었던 일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게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재유햄 상태가 이상한 거예요. 어제까지는 분명 멀쩡했어요. 돌아버리겠는 게 이게 완전히 맛이 가서 누가 봐도 정신 나갔네 싶은 것도 아니고 괴리감 느껴지는 정도란 말이죠? 근데 자기 힘든 거 티 안 내는 재유햄 성향상 이걸 저희가 느끼고 있는 것 자체가 좀 심각한 일 같고, 그래서 감독님한테라도 털어놔서 상담이라도 주선해봐야 할지 고민 중인데 어른까지 끌어들여도 될지 모르겠어요.”

정희찬은 청산유수처럼 할 말을 쏟아냈고 숨을 골랐다. 여기서 조재석이 할 수 있는 일 첫 단계는 사실 검증이다. 정말 이상한 게 맞는지, 맞다면 언제부터 그리되었는지.

“그냥 기분 탓 아니야? 잠을 잘못 잤다든지.”

“아님. 하루 종일 숙소에서 얼굴 보고 사는 우리가 보증함. 그 햄 눈이 죽은 생선이 되어있는 게 완전 정상 아니었음.”

“그밖에 더 이상한 건 없었어? 어제는 언제까지 멀쩡했는데?”

“이상한 건 많죠. 어제 일도 오락가락하고 뭔가 사람이 멍해져갖곤 반응도 좀 둔해졌고. 준수햄한테 유독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어제는 하루종일 평소 같았어요.”

조재석은 약간 소름이 돋았다. 경기 때도 느꼈지만 기상호는 저런 걸 일일이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싹할 때가 있었다.

“근데 애매한 게 재유햄은 전하한테 늘 잘해줬다. 지금도 우리 저어언하 재유햄이 주고 간 삼계탕 맛있게 드시고 계시는데.”

“뭐, □끼야. 그럼 니들 배때지에 들어가게 놔둘까? 주둥이 찢어버리고 싶으니까 닥쳐.”

성준수가 공태성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3학년 형들이 그러길 원중고 시절의 성준수는 성깔 지독한 걸로 유명했다던데 전학이라는 환경 변화는 그의 성격을 전혀 유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준수야! 아직도 팀ㅇ… 읍.”

삼계탕을 두 접시 받는 데 성공한 전영중이 화색을 띄며 깐족거리려고 했지만, 전영중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지국민이 늦지 않게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재석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형은 언제 나잇값을 할까.

“아무튼 태성이 말대로 잘해줄 수도 있지. 유일한 같은 학년인데.”

“아무리 그래도 준수햄 밥 먹는 거 흐뭇하게 구경하면서 몸조심하고 오래 살아야 한다고 덕담하는 건 정말 아니었어요.”

“아. 그건 좀. 그런데 그 형 동그랗게 생겨선 하는 짓은 왜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 같냐.”

“그 햄 원래 그럼. 군것질거리도 바밤□나 약과, 꿀 꽈배기, 팥붕 그런 거 좋아함.”

“아무튼 앉혀놓고 물어봤지. 무슨 일 있었냐고. 질 나쁜 놈한테 걸려서 협박이라도 당하냐고도 물어보고 애들도 다 내보내고 물어보고 붙잡고 짤짤 흔들어 보기도 하고 묶어놓고 간지럼도 태워봤는데 말을 안 해, 말을 안 한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철이랑 임승대 그 자식한테도 연락 해봤는데 왜 그러는지 모른대! 그리고 이 □끼들은 평소에는 엿 바꿔 먹은 겁을 처먹어서 재유 하란 대로 하고 있고.”

성준수는 말을 마치고 냉수를 입에 때려붓더니 지상고 농구부원들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평소 모드로 돌아온 기상호가 풀 죽은 채로 중얼거렸다.

“준수햄… 그때 재유햄 진짜 무서웠어요….”

“전하야 겁대가리 상실한지 오래라 모르시겠지만, 그때 재유햄 좀 쫄릴 정도로 빡쳤다니까요?”

“아니, 빡치긴 뭘 빡쳐.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더구만. 평소에도 그렇게 선배 공경 깍듯이 하면 얼마나 좋냐?”

“어쨌든 제일 환장하겠는건 그거임.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상해지냐는 거임.”

진재유의 이상함에 대해 털어놓으며 그나마 열이 올랐던 지상고의 분위기는 김다은이 제기한 의문에 다시 침울해졌다. 아무도 이 질문에 타당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더더욱. 조재석도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산에 처박혀서 와이파이도 안 터지는 시설에서 그렇게 사람 변하게 만들 일이 뭐가 있다고.

“그래서 말인데 재유햄이랑 얘기 한번 해 주실 수 있나요?”

정희찬이 조재석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엥? 내가? 진심으로?”

“친한 사이라 할 수 없는 말을 데면데면한 사이에서는 털어놓을 수도 있잖아요. 원중고에서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재석햄밖에 없어요. 제발 부탁해요.”

정희찬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글썽거렸다. 조재석은 얼굴 몇 번 보지도 않은 연장자의 고민 상담을 해줘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저렇게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 그 우려하는 마음을 아는데 모른척할 수 없었다. 그도 만약 갑자기 이 상황에서 3학년 형들이 이상해진다면 정희찬에게 상담이라도 한 번 해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것 같았다.

“정 그렇다면…. 알겠어. 한 번 물어보긴 할 텐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앗, 그럼 나도 갈래. 같이 준수 뒷담 까야지.”

전영중이 불쑥 튀어나왔다. 저 형은 평소에 얌전한데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저 시□것은 꼭 놓고 가고. 원중고는 애□끼 관리도 제대로 못 해?!”

성준수가 이를 갈며 고함쳤다.


상호가 숙소에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서 같이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서 한순간에 판타지 세계관에 떨어지게 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죽음을 반복하게 된다. 이런 만화영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재유는 잔인성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만화처럼 괴물과 마법이 있는 세상이 괴이만 있는 현실보다 훨씬 덜 잔인한 것 같았다. 시련을 줬으면 그에 맞설 수 있는 능력도 줬어야지.

재유는 체육 시설 앞마당 겸 주차장에서 U자 주차 차단봉에 앉아있었다. 화단에 심어둔 커다란 버드나무가 넓게 그늘을 드리웠고 기온은 텁텁하리만치 더웠지만 산간 지역의 서늘함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지도와 주차장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약도를 찍은 사진을 비교하면서 어쩔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확인해볼 거리는 두 가지였다. 창귀의 퇴치와 삼지창과 부적의 출처. 후자는 애들한테 붙들려서 심문당하는 바람에 지국민에게 말 붙일 짬을 내지 못했다. 연습 도중에는 더더욱 시간이 없었고 어딜 가든 지상고 농구부원들의 각별한 관심이 따라붙어 이번에는 전자의 해결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창귀는 붙어있는 부위에 따라 총 세 마리가 있다고 하니 창귀를 봉했다는 무덤도 세 개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 개는 위치가 알려져 있었다. 일종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어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었다.

문제는 거기까지 가는 데 예상 소요 시간이 편도 한 시간이 넘었다. 거길 가려면 오후 농구 연습을 빠져야 한다는 소리였다. 우습게도 이 지경이 되었더라도 그의 인생 중심축을 차지하는 농구에 소홀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뭔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었던 끈을 놓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미적거리며 시간을 날리고 있었다.

“어? 찾았다! 형!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조재석이 3층 창문 밖으로 상체를 쑥 내밀더니 소리쳤다. 재유는 그에게 시달린 기억이 떠올라서 자리를 피할까 싶었지만, 기운이 없기도 하고 피하면 왜 피하냐고 더 귀찮게 할 것 같아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거기서 뭐 해요? 온통 나무밖에 안 보이는데.”

쫄래쫄래 다가온 조재석이 재유 옆에 앉아서 눈썹 밑에 손을 데고 앞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는 전영중이라는 의외의 짐덩이를 달고 있었는데 그도 덩달아 조재석이 보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산의 맑은 공기랑 경치를 즐기는 기다. 나무에서는 피톤치드라고 항균 물질이 나온다는데 산중에 있으면 기분 상쾌해지지 않나? 온통 녹색이라 눈이 편안하기도 하고. 도시에 있으면 이런 거 못 느낀다.”

“나는 순 음침해가지고 기분 나쁜데.”

전영중이 공터 경계의 잡목들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건 니가 어려서 아직 뭘 모르는기다.”

“너랑 나랑 동갑인데 뭔 소리야. 보고 있으면 음산해서 귀신 튀어나올 것 같지 않아?”

“솔직히 영중이 형이 유난일 때가 있긴 한데 이번은 저도 그래요. 뭔가 섬찟하달까….”

재유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상쾌하기만 하구만. 서울깍쟁이들이란.

“그래서 형, 무슨 일 있어요? 혼자 고독을 즐기는 게 아주 막 심각한 고민이 있어 보이시는데…. 저한테만 딱 말해주면 안 돼요? 네?”

조재석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제 봤다고 아주 친근한 태도가 부담스러워서 최대한 상체를 뒤로 뺐다. 전에도 느꼈지만, 귀염성 있게 생겨선 사람한테 다가가는데 스스럼이 없는 애였다. 뭐, 재유보다 10센티 가까이 큰 고등학생을 귀여워해 봤자지만 말이다.

“재석아. 싫어하잖아.”

전영중이 조재석이 입은 저지 등판을 잡아서 떨어뜨려 놓았다.

“아! 죄송해요. 하지만 제가 대나무숲 노릇은 엄청 잘할 수 있는데. 부담되시면 영중이 형을 저 멀리 떨궈놓고 올 테니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하고 시원하게 외쳐보세요.”

“지상고 아들이 물어보라 캤나?”

“어, 아니요?”

답은 빨랐지만, 조재석은 재유의 시선을 피했다. 시킨 게 맞구나.

“내가 말한 거 쪼르르 가서 일러바칠 기가?”

“상담에서 비밀 보장은 기본이죠.”

조재석이 가슴을 당당하게 펴며 환하게 웃었다. 재유는 가만히 앞을 내다봤다.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바람결을 느끼면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관목을 바라봤다. 덩어리져 몰려오는 구름 따라 그늘이 생겼다 사라졌다. 대면하고 있는 게 일 년에 몇 번 있는 경기에서 우연히 볼까 말까한 서울 애라 그런지 불어오는 바람 따라 변덕이 불쑥 들었다. 조재석 정도면 부나방처럼 죽음을 자초할 성격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결국 잊힐 일인데.

“너는 하루가 반복되면 어떨 것 같노?”

“하루가 반복되면….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봐야죠. 수진이랑 같이 담 넘어서 pc방도 가 보고 형들 골탕도 먹여보고. 그런데 일단 제일 좋은 건 슈팅 연습을 원 없이 할 수 있다는 점 같아요. 하루는 너무 짧은데 슛도 10,800개 정도 넣고요!”

조재석은 잠시 고민하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해맑게 늘어놓았다. 그 나잇대 애들이 할 법한 천진난만한 상상이었다.

“그 하루의 끝에 커다란 호랭이가 튀어나와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 죽인다면 어떻겠노? 어떻게든 뭐라도 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물릴 수도, 호랭이를 잡을 수도 없어 깨작깨작 용쓰면서 죽기 전까지 험한 꼴 많이 보지 않기만을 빌어야 한다면? 너라면 어떻게 하겠노?”

재유는 조재석의 맑은 검은색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거라 여기지도 않은 일을 이해해서 답변을 내놓으라는 심통이었다. 그런데 조재석은 서글픈 표정으로 재유를 바라봤다.

“저는 사람들을 최대한 설득해서 따라오는 사람들만 데리고 도망칠 거예요. 도망쳐도 괜찮아요. 형은 지금 괜찮은 거 맞아요?”

무릎에 얹혀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톱이 바지를 파고들었다. 아니. 나는 도망칠 수 없어. 책임을 져야 해. 내 상태? 늪에 처박힌 것 같지만 인식하지 않으면 괜찮아. 땀에 젖은 운동복 같은 거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문장이 마음속에서 스러져 갔다.

“야. 재석이한테 심술부리지 말고 정신과 상담부터 알아보는 게 어때? 조롱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야.”

전영중은 송충이 씹은 표정을 지으며 떨떠름해했다. 그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재유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줘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는 완전 제정신이지. 다 거짓말이거든.”

재유는 살짝 웃으면서 맞받아쳤다. 전영중은 어이없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 장난하냐? 진지하게 한껏 무게 잡고 소설 쓰더니 마지막에 하는 소리가 거짓말이라고? 그리고 재석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들으면 반응해 주지 말고 의심부터 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녜요? 절에서는 사람이 한 번 죽고 사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

조재석이 태연하게 대꾸하자 전영중은 답답해했다.

“재석아. 지금 그게 아니잖아. 지금 쟤가 하는 정신 나간 소리가 불교에서 하는 소리랑 같니?”

“지금 개인이 믿는 종교에 태클 거시는 거예요? 와. 영중이 형 인성.”

“그거랑 그게 같지가 않다니까? 몰라. 알아서 해.”

전영중은 박박 우기는 조재석한테 약간 짜증냈다. 자기 때문에 같은 학교 선배한테 듣지 않아도 될 짜증을 듣고 있어서 미안했다.

“내 편 그렇게 안 들어줘도 된다. 내가 뭘 잘못 주워먹었나갑다.”

“아니, 이 형도 진짜. 헛소리 그만하고 제가 하는 말이나 들어봐요.”

조재석은 헛기침하더니 눈을 감고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에 앉더니 불상이 해 보이는 손동작을 취했다.

“불교에서 뭐라고 하냐면요, 사람은 죽으면 그 생에 쌓은 업에 따라 6개의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 그러거든요? 그러나 삶에는 여덟 가지 고통이 가득하며 일생 동안 이에 시달리니 태어나지 않음이 홍복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 고통의 굴레 속에서 수행으로 갈고닦아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되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조재석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검지로 재유의 미간을 찌를 듯 가까이 가리켰다.

“그대여. 절망하지 말지어다.”

잘못 던진 농구공에 얻어맞은 듯이 머리가 띵해졌다. 넋 나가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는 더 노력해야 하는 거네?”

“네? 어… 뭐… 그렇죠…? 삽질할 시간에 공 한 번 더 던지는 게 낫긴 하니까요. 아무튼 기운 내요.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 힘들고 괴로운 일도 끝날 거에요.”

그가 눈을 찡긋거리며 상큼하게 윙크했다.

“노력도 하기 나름이지. 잘못된 노력은 나쁜 습관만 들고 안 하느니만 못해.”

용케 잠자코 있던 전영중이 못마땅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참견했다.

“그리고 이거 가지고 있어요. 어머니가 주신 건데 저보다는 형한테 더 필요해 보여서요. 불교에서 염주는 번뇌를 끊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요. 어머니는 복받으라고 주신 것 같지만요.”

조재석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염주 팔찌를 꺼냈다.

“어머니가 준 물건도 받고 내가 참 염치가 없다.”

“대신 이거 받으면 지상고 애들한테도 말하는 겁니다? 걔내들이 형 얼마나 걱정한지 알아요?”

“알았다, 알았어.”

재유는 양심이 콕콕 쑤시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생각이 없어서 더더욱 양심이 켕켰다.

“야야. 일단 가자. 점심시간 다 갔어. 우리 연습 늦겠다.”

전영중이 조재석과 진재유의 등을 떠밀었다. 재유는 이대로 순순히 실내로 들어갔다가는 오늘 내로 나오기는 글러먹겠다는 직감 같은 게 들었다.

“재유야, 뭐해? 가야지. 혹시 토끼기라도 하게?”

뒤를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전영중이 싱긋 웃었다. 하여튼 겉보기에는 멀끔한데 꼬인 성격만큼 눈치가 기가 막혔다.

“뭔 소리가. 검색할 게 있는데 폰 좀 빌릴 수 있나?”

“너 휴대폰 가지고 나왔잖아.”

“데이터 다 썼다.”

“…이상한 거 보지 마.”

재유는 전영중의 휴대폰을 받자마자 카카□톡을 켜서 원중고 농구부 단톡방에 들어갔다.

-합숙에 부적 들고 온 놈, 해 떨어지기 전에 방에 방비 단디 해 놔라.

“야! 내 폰으로 뭐 하는 짓이야!”

“형? 이게 무슨 소리에요?”

재유를 유심히 지켜보던 전영중이 휴대폰을 빼앗았지만 전송 버튼은 눌린 뒤였고 앞서 가던 조재석은 톡방 화면이 켜진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이런 □발. 전영중이 지울 수 없게 된 메시지를 보며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재유는 혼란을 틈타 뛰쳐나갔다.

 

비가 억수로 내렸다. 걸친 저지는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었고 억센 풀에 찢긴 바짓단이 너덜거렸다. 몇 번 넘어지는 바람에 손바닥에는 얕은 상처가 나 있어 비가 흘러 들어가니 따끔거렸다. 감기 걸린 것처럼 이마에 열이 올랐다.

재유는 도주 초기에 유리한 출발을 한 덕에 전영중과 조재석의 신체 스펙이 상대적으로 뛰어남에도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체력 싸움이었고, 재유는 지상고에서 제일 잘 뛰었다. 어느 순간 전영중은 조재석과 함께 추적을 포기했다. 그 둘이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 즉시 휴대폰의 GPS를 켜서 던진 뒤 목적지까지 이어져 있는 산책길 코스에서 이탈해서 능선을 따라 이동했다. 포슬포슬 내리기 시작한 이슬비는 호재였다. 119 구조대원들이 그가 몸을 숨긴 곳 근처를 지나가곤 했지만, 비가 흔적을 지웠고 먹구름이 해를 가려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길 없는 험지로 이동해서 몇 번 미끄러졌고 이따금 지상고 농구부원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또는 이현성 감독이 놓고 갈 테니 우비라도 가져가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힘든 일이 몇 번 있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재유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굵게 내리는 비는 바닥에 고여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찰박거렸고, 오후임에도 하늘은 짙은 잿빛이었다. 그는 돌무덤 옆에 높인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호식총.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의 유해로 만든 무덤으로 금역의 상징이었다. 그 밑으로는 호랑이에게 봉사하는 창귀와 그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돌무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켜켜이 쌓인 돌들에는 부드러운 이끼가 피어 있었고 맨 꼭대기에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녹슨 대야 같은 게 엎어져 있었다. 저건 떡 찌는 데 쓰는 시루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자, 그래서 이제 어찌할까. 재유는 이 근방을 꼼꼼하게 살폈다. 항아리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땅을 죄다 파 봐야 하나 싶었지만 그건 너무 기약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좋은 표식이 있지 않는가.

재유는 다시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지 확인했다. 시루를 내린 뒤 돌무덤을 발로 걷어찼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저지르는 문화재 파괴였다. 작은 돌이 굴러떨어졌다. 한 번 더 걷어찼다. 자잘한 돌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걷어차도 끄떡없는 큰 돌들은 일일이 들어서 옮겼다. 무릎 높이까지 치웠을까. 고추장 담글 때 쓸 법한 작은 독이 보였다. 독에는 눈 감은 사람의 얼굴과 머리카락 문양이 새겨져 있어 잘린 사람의 머리를 연상시켰다. 차가운 손끝에 느껴지는 꺼끌꺼끌한 표면의 감촉이 바짝 마른 가죽 껍데기 같았다.

추측하건대 호환귀의 본체는 그가 깬 상자 속에 있던 두개골이다. 그렇다면 창귀의 본체는 무엇일까? 창귀는 호환귀에게 종속되어 있고 호환귀의 본체가 창귀의 본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창귀도 호환귀처럼 본체가 따로 있다면? 이 경우에는 인간의 두개골 내지는 머리가 본체가 아닐까?

재유는 독을 평평한 바닥에 내려두고 주먹만 한 돌을 쥐었다. 혹시 귀신 한 마리를 세상에 추가로 꺼내놓는 우를 범하는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미 대형 사고를 쳤는데 작은 사고 하나 더 쳐봤자 고생길 훤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심호흡한 뒤 돌로 독을 내리쳤다.

독은 반으로 쪼개졌고 구운 흙이 산산조각나는 파열음 대신 비명 같은 찬탄이 울려 퍼졌다.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거기서 전달되는 기쁨을 통해 알 수는 있었다. 400년 동안 악귀에게 묶여 있던 혼이 자유가 되었구나. 독은 일종의 본체가 맞았다. 도대체 호환귀 담은 상자는 깨먹으니 봉인이 풀라고 창귀 담은 항아리는 깨면 해방된다는 통일감 없는 메커니즘은 이해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독 안에는 누런 종이봉투도 있었다. 겉에는 붓글씨가 써져있었지만, 이 물바다 속에 푹 젖어버려 글씨를 읽기 힘들었다. 나중에 말려서 읽을 겸 주머니에 넣었다. 독을 부술 때 줄이 늘어난 묵주 팔찌도 주머니에 넣을까 하다가 왼팔에 찬 채로 두었다. 멀쩡한 상태로 돌려주고 싶었는데. 팔찌 꿰는 데 쓰는 줄은 뭐 쓰는지 알아봐서 줄 새로 꿰서 줘야지.

그런데 사람이 비명을 지르면 사람이 오는데 귀신이 비명을 지르면 무엇이 올까? 이제 익숙할 지경인 오싹한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터럭이 부풀어 올라 덩치가 더 커 보이는 호환귀가 눈을 일그러뜨리고 온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를 표출하고 있었다.

재유는 경직된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왔던 방향으로 뛰었다. 여기서 죽을 수 없었다. 오늘 이룬 일을 무로 돌릴 수 없었다. 반쯤 무너진 호식총이 산산조각나면서 돌덩이가 등을 때려 앞으로 엎어졌다. 무릎이 쓸려 뜨끈거렸고 까진 손바닥 상처에 모래가 들어가 아팠다. 저지 목덜미를 잡아당겨 끌고 가는 힘이 느껴졌다. 저지 지퍼를 부들거리는 손으로 내리고 팔을 빼냈다.

호환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터럭은 가라앉았지만 기분 나쁘게 사람을 닮은 눈에는 사악함과 분노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방호 수단을 없애 버린 먹잇감을 곱게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붙잡히면 고양이가 가지고 노는 작은 새보다 더한 꼴이 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고양이는 고문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지능이 없으니까.

재유는 길에서 벗어나 산비탈을 내려갔다. 떨어져 켜켜이 쌓인 잎이 물에 젖어 미끌거렸다. 나무줄기를 붙잡고 회전해서 방향을 바꿨다. 안타깝게도 네발짐승은 두 발 인간보다 훨씬 산을 잘 탔다. 그것은 재유를 앞질러서 뛰어올랐다. 팔이 잘려나갈 각오를 하고 맹견은 사람의 목부터 노린다는 어디서 봤는지 모를 상식에 기반해서 팔로 목을 감쌌다. 이빨이 오른팔에 박히면서 뼈를 건드렸고 근육들이 뜯겨나갈 듯이 잡아당겨졌다. 비명이 나왔지만 예상만큼 위력이 강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필사적으로 딴생각을 떠올렸다. 아, 맞다. 시간. 먹구름과 빽빽하게 솟은 나무들 때문에 어두울 뿐이지 지금은 저녁이라 봐줄 수도 없는 오후였다. 왼팔로 그것의 눈을 찔렀다. 차고 있던 묵주 팔찌가 터져나갔고 묵주알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은 높고 가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앞발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

팔에서 길쭉한 이빨이 뽑혀 나갔고 잡아당기는 힘이 사라져 중심을 못 잡아 비탈을 굴렀다. 물에 젖은 몸에 흙과 부스러진 낙엽이 달라붙었다. 돌부리에 채인 몸이 욱신거렸다. 진동이 느껴졌다. 물에 젖은 지반은 건장한 운동부 학생의 체중을 버틸 수 없었다. 땅이 무너져 내렸다. 추락하며 허공을 휘젓던 손이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움켜쥐었지만, 부상 입은 팔에 체중이 실리며 느껴지는 통증에 놓치고 말았다.

수면과 부딪히는 충격에 숨을 헉 들이켰고 입에 물이 들어왔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급류가 몸을 이리저리 밀쳤다. 여름인데도 계곡물은 청량하게 차가워서 체온을 뺏어가고 발버둥을 점점 둔하게 만들었다. 손에 닿는 아무 물체나 잡으려 했지만 속력을 이기지 못해 세운 손톱이 까뒤집혔다. 돌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폐에 머금고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입에서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솟아올랐다. 난류가 의식 잃은 인간의 육신을 물 밑으로, 다시 건져내지 못할 곳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