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인한 묘사가 있습니다.
- 사람 따라 공포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묘사가 있습니다.
- 허구의 인명과 지명이 등장합니다. 실존하는 인물과 장소와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코골이가 매미 울음과 성량을 겨루듯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희찬이가 다리를 상호의 배 위에 올려놓고 자고 있었고 상호는 갑갑한지 꿍얼거렸다. 재유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수가 재유의 이불과 다은이의 베개로 몸을 둘둘 만 채 자고 있었다. 그가 편안하게 호흡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인지의 착란이 점차 안정되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합숙 사흘 차 날짜에 시간은 오전 5시 28분이었다. 이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상황을 정리했다. 창고에 있던 상자의 봉인을 부순 뒤로 때가 되면 범 귀신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학살했고, 이 과정에서 재유가 사망하면 합숙 사흘 차 새벽에 숙소 방에서 눈이 떠졌다. 영이 사물과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시간이 되풀이된다니, 초등학생 때부터 교육받은 상식에 위배되는 현상이었지만 친구의 두 번째 죽음,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던 피의 끈적거리는 감촉은 과학 교과서의 페이지보다 더 생생했다. 실존 앞에서 가능, 불가능을 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었다.
문제 해결 방법을 꼽아 보았다. 떠오르는 해결 방법 하나. 감독님들을 설득해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철수한다.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증거 없이 상식을 벗어나는 내용을 믿고 큰 결정을 내리도록 설득할 수 있는 언변은 재유에게 없었다. 상상해 보자. 그가 감독들 방에 가서 있다가 해가 지면 호랑이 귀신이 튀어나와 사람을 채 가니 당장 하산해야 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현성 감독이 이렇게 말할 터였다. 재유, 니 어디 아프노?
두 번째 해결 방법. 내일이면 합숙은 끝난다. 그러니, 오늘 밤을 어떻게 넘기고 각자 학교로 돌아간다. 불안한 점이 많은 방법이었다. 일단, 방에 있는 부적이 제 기능을 못 했다. 첫 반복 때 그것은 방 안에 들어와서 아수라장을 만들어 놓았고 두 번째 반복 때에는 방에 붙어있는 부적이 기운을 못 견딘 것인지 검게 변색됨을 확인했다. 방비를 보장할 수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무속과는 연관 없는 삶을 살아서 오컬트 관련 상식이 전무했다. 그나마 생각나는 소금은 매점 하나 없는 산 중턱 체육관에서 적법한 수단으로 하루 만에 구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었다.
세 번째 방법, 그것을 죽인다. 게임 속의 게임 오버 요소처럼 해가 지면 그것이 덤벼올 것이니 대면은 피할 수 없었다. 대항할 수단을 연구하고 마련하는 일은 필수적이었다. 문제는, 잡아본 칼이라고는 식칼과 커터칼이 전부인 재유가 맹수의 형태를 띤 악귀를 물리칠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준수의 팔부터 떠올랐다. 이런 일에 같이 농구하는 팀원들을 끌어들이라고? 미친 소리였다. 일단 이걸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 재유에게는 팀원들의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를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그의 선에서 끝내는 게 최선이었다.
갑자기 이 고요한 분위기에 극심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한 번 이상 죽었던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곤히 자고 있었다. 재유가 보고 겪었던 피바다와 비명과 고통이 전부 다 거짓이었던 것처럼. 부유감이 들었다. 땅을 밟고 있어도 그런 것 같지 않은 그런 느낌. 이 신경이 무뎌지는 듯한 감각이 버틸 수 있는 한도를 초과한 비극을 겪었는데도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그는 속한 세계가 달라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훈련의 고됨에 투덜거리면서 걱정이라곤 입시 결과와 경기 결과뿐인 세계와 구전괴담이 현실이 되는 끔찍한 세계로.
그러니 그는 정말 혼자였고 그 어느 때보다 잘해야 했다. 준수의 힐난대로 그가 벌인 일은 어떻게든 완벽하게 책임지고 수습해야 했다. 이타심이나 선량함 같은 감정은 당연히 아니고, 죄악감이었다. 그리고 원래 인간은 혼자였다. 코트 위에서 슛을 누가 옆에서 대신 던져주거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그는 괜찮았다.
재유는 희찬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에어컨 온도를 1도 높인 뒤 씻으러 나왔다. 잠이 덜 깨서 머리가 멍할 때 물을 끼얹어주면 정신이 좀 맑아졌다. 그는 씻으면서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현성 감독은 농구할 때 늘 생각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생각을 통해 내리는 판단의 바탕이 되는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정보다. 상대 선수의 프로필, 상대 팀의 경기 기록과 전술 등의 정보가 모였을 때, 비로소 합리적인 결정을 가능케 한다. 지금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휴대폰을 챙겨서 나왔다. 준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휴대폰을 하는 상호 때문에 한밤중에 깬 적이 있었다. 그런 놈 옆자리에서 휴대폰을 하면 일어나 달라고 고사 지내는 거였다. 복도 끝 계단에 앉아서 한 줌 남은 데이터로 여러 키워드와 지금 있는 체육 시설 이름을 조합해 검색을 해봤다. 그 결과 이 시설이 기분 나쁜 걸로 암암리에 소문이 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혹시 몰라 끼고 있는 산 이름으로 뭔가 사건이 없었는지 검색해 보았다. 최근에 실족 사고가 몇 번 있었다는 점과 귀신 봤다는 루머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여기까지 검색하고 데이터가 동났다. 재유는 머리를 싸맸다. 확인한 점이라곤 그가 깨먹기 전까지 상자의 봉인이 얼마나 완벽했는지밖에 없었다.
기운이 빠져 층계참에 드러누웠다가 허리가 배겨 일어났다. 이렇게 된 거, 상자가 있던 방에 다시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방 벽 한쪽에 책장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가는 김에 MP3 회수도 하고 말이다. 터덜터덜 1층으로 내려가서 뻔질나게 드나든 방문을 열었다. 문에 걸린 자물쇠부터 바닥에 난 먼지 쓴 자국까지 그가 합숙 이틀 차에 난장 쳐 놓고 간 그대로였다. 오른편의 책장을 확인했다. 정말 다행이도 책이 쌓여 있었다. 네 권이었는데 떠날 때 가져가려고 놔뒀다. 그는 바닥에 깔린 나무판자를 일일이 두드렸다. MP3 챙기면서 매트도 한 번씩 들춰 보고 맨 위 칸에 있는 걸레들도 살펴보고 아예 선반을 밀어서 벽 뒤도 확인해 보았다. 매체에서 보면 이런 데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던데 아무것도 없었다.
책을 챙겨서 2층의 소화전에 숨기고 방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7시가 다 되어가는데 일어난 놈이 아무도 없어서 일일이 깨웠다. 아침은 늘 제일 소란스러운 때였다. 먼저 씻겠다고, 또는 조금이라도 더 자겠다고 다툼이 벌어지고, 옷을 꺼낸다고 짐이 쏟아져 나왔다가 다시 꾸깃꾸깃 가져온 가방이나 캐리어로 들어갔다. 옷을 입으면 급식실로 질주했다. 혈기 넘칠 운동부 학생 6명이 한방을 쓴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재유는 급식을 빠르게 먹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오늘 역시 입맛이 없었지만, 아예 끼니를 걸러버리면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예를 들어 상호라든지- 꾸역꾸역 먹었다. 그래도 함박스테이크는 너무 비려서 못 먹고 준수한테 줬다. 남은 함박스테이크를 쟁취하고자 질주하는 애들을 뒤로하고 나와서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선객이 둘이나 있었다.
“힘 팍팍 줘봐. 네가 손 삐끗하면 나 골로 가는 거야, 어?”
우수진은 농구공 넣는 철망을 들어 올리고 있었고 조재석은 엎드려서 철망의 바닥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우수진의 팔이 부들거리는 게 영 불안했다. 재유는 뭔 짓 하나 싶기도 하고 우수진이 철망을 놓칠까 봐 같이 들어주었다. 조재석은 제풀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철망 모서리에 띵 소리 나게 뒤통수를 박는 바람에 머리를 싸매고 바닥을 굴러다녔다. 재유는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둔 영화 배경에 나오는 회전초처럼 굴러다니는 조재석을 붙잡아 앉히고 찧은 부분을 살살 눌러보았다.
“괘안나? 좀 부었다. 찜질하게 아이스팩 가져다줄까? 계속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러우면 감독님들한테 말해라.”
“씨…. 혹 났어. 재유 형! 놀랬잖아요!”
조재석은 머리를 만지고 울상 짓더니 바락 소리쳤다.
“형?”
“저보다 나이 많으니까 형이죠.”
“뭘 했길래 그리 놀라노? 도둑질하다 들킨 것도 아니고.”
“아니, 그거야 재유 형이 있는 줄 몰랐는데 다가오니까 놀라서…. 아무튼! 제가 어제 뭐 찾았는지 알아요?”
조재석은 받아쓰기 점수 자랑하는 초등학생처럼 가슴을 쫙 폈다. 재유는 찾은 게 뭔지 알 것 같았지만 정답을 맞히면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당할 거고 그에 대한 변명 궁리하기도 귀찮아서 적당히 장단 맞춰 주었다.
“뭐길래 그리 신났노?”
“부적이요! 밤에 형들이랑 베개싸움 하다가 옷장을 넘어뜨렸거든요? 그래서 서랍장이 다 쏟아졌는데… 거기 밑바닥에 부적이 붙어있는 거예요! 엄청 신기하지 않아요? 저 부적도 붙어있는 거 여기 와서 처음 봤어요! 그러면 이게 다른 데도 붙어있는지 궁금하잖아요? 그래서 찾아보고 있었어요.”
조재석은 상호나 다은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정신 사나운 애였다. 걔들이 부끄러운 헛소리를 한다면 조재석은 굉장히 활달하고 까불거렸다. 그 잠깐 말 들어줬다고 기가 쭉 빨리는 기분이었다. 저번에 지상고 숙소 옷장을 까뒤집어서 부적을 확인했던 걸 보면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잘하고.”
재유는 참견하지 않고 지들끼리 체육관을 뒤집어엎으라고 놔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우수진의 어깨를 밟고 올라가 농구 골대를 살펴보는 폼이 참 불안했다. 우수진이 움찔거릴 때마다 조재석이 흔들거렸다. 재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 망친 날, 숙소에 준수와 태성이만 단둘이 놔둔다 해도 이렇게 물가에 애 내놓은 기분은 아니었다.
“…내도 찾는 거 도와줄까?”
재유는 잠깐의 휴식을 포기하고 조재석과 우수진에게 말을 걸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체육관은 사용하지 않을 때는 사람 출입이 없으니 여차하면 부적을 떼다 쓸 수도 있을 터였다. 조재셕은 그 높이에서 멋지게 폼까지 잡으며 뛰어내리더니 머리가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기…. 형, 전화번호 좀 주실 수 있어요?”
기회를 타 우수진이 쭈뻣거리면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언제 봤다고 은근슬쩍 조재석 따라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저렇게 나오는데 전화번호도 안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우수진의 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
그 뒤로 재유는 조재석이 사고 못 치게 감시하면서 체육관 이곳저곳을 뒤졌다. 우수진도 얌전히 있었던 건 아닌데, 차라리 말을 걸지 늘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져서 피곤했다. 매시간이 지상고 1학년들은 얼마나 얌전하고 순했는지 재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원중고 3학년들은 어쩌자고 저놈들을 혼자 놔두는 걸까. 중학교에서 후배 관리를 이 모양으로 했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바로 얼차려였다.
고생은 지국민과 준수가 오면서 끝났다. 준수는 남의 학교 선배가 니네 꼬붕이냐며 우수진과 조재석을 쫓아냈고 지국민은 그런 준수의 행동을 못마땅해하긴 했지만, 염치는 있어서 재유한테 고생했다고 인사하고 그 둘을 데리고 갔다. 구석에 앉아서 준수가 뽑아 온 캔 식혜 캔을 홀짝거리니 살 것 같았다.
그래도 부적을 5개 찾아낼 수 있었다. 재유는 오컬트의 ㅇ자도 모르지만 변색된 부분 없이 빨간 물감으로 그려진 글자인지 그림인지가 또렷한게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재유는 점심을 먹고 난 뒤 책을 펴볼 수 있었다. 빨리 밥을 먹고, 아직 방에 아무도 없을 때 책을 꺼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종대왕님이 창제하신 훈민정음에 대한 신뢰로 고서를 읽을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책 제목으로 떡하니 한자가 세로쓰기로 적혀 있었지만 한자는 번역기의 힘을 빌리면 될 거라 여겼다. 책장을 넘기자, 한자와 괴상하게 생겨먹은 자음과 모음이 그를 반겨주었다. 우매한 인간의 뇌리에 작년 국어 선생님이 강조했던 시가 하나가 떠올랐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그때 선생님은 문법을 이해하라 했지만 재유는 그럴 깜냥이 안 돼서 다 외웠다.
그때 아득바득 이해했어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중세 국어와 한자가 섞여 있어 번역기 돌리기도 곤란하고 감으로 읽을 수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았다. 여러 실패 요소를 고려했지만, 고작 책 하나 못 읽어서 막힐 줄은 몰랐다. 이건 반복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라 더 당혹스러웠다.
누가 머리를 푹 누르듯 헤집으면서 책을 손에서 휙 빼갔다.
“혼자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요? 음…. □댕, 이게 뭐야?”
태성이는 재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책을 훑어보더니 이맛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그는 팔을 쭉 뻗어 책을 뺏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재유를 막으며 여유롭게 글자를 눈싸움하듯 노려봤다.
“그거 이리 내라!”
“어…. 어부가 무슨 풍에서 인어를 잡았다…? 에에씨. 한자를 못 읽겠네.”
재유는 입이 떡 벌어졌다. 태성이가 더듬더듬 줄글을 읽고 있었다.
“그거 읽을 수 있노?! 어떻게?”
재유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맨날 연습 쨀 궁리만 하고 화나면 주먹질이나 해서 영 못미더웠는데 이런 유식한 모습이 굉장히 의외였다.
“햄은 제가 어떻게 농구부 들어왔는지 알죠? 그때 저희 어머니가 잠깐 혹하셔서 선행한다고 잠깐 학원 다닌 적이 있거든요? 거기서 얼어 죽을 중세 국어 가지고 죽어라고 고생해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너 참 대단하다! 내는 수업을 들어도 하나도 몰겠는데.”
맞다. 태성이는 농구부에 들어오기 위해 내신 평균 90점을 받아낸 적이 있었다. 그걸 알고는 있었는데 평소 행실 때문에 영 실감이 안 났다.
“아니 왜 갑자기 사람 치켜세우다가 풀 죽고 그래요. 뭐, 그러면 이거 읽어드릴까요?”
공태성은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재유는 멈칫했다. 틈만 나면 준수한테 대거리하는 거 보면 액셀 밟는 깡다구 하나만은 준수 뺨칠 텐데, 저 책을 읽혔다가 뭐라도 눈치를 채면….
“그래주면 고맙지.”
재유는 어금니를 악물고 책을 전부 들이밀었다. 어떻게 행동하는 게 덜 어색할지 생각하고 한 행동이었다. 이미 한 박자 머뭇거렸다는 점에서 의심을 살 수도 있었지만, 공태성은 의아함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상호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재유가 아무리 붙잡고 늘어져 봤자 태성이 손을 빌리는 것만 못할 것 같았다. 미안했지만 활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인생에서 읽은 제일 두꺼운 책이 교과서일 태성이는 그 양을 보고 질색했지만, 순순히 독해를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귀신이나 요괴들과 관련된 사건 일지었다. 이런 단체 숙박하는 수학여행 분위기 나는 모임에서 풀어놓기 좋은 이야기였다. 점심시간이 지날수록 밥을 다 먹은 팀원들이 합세하면서 방에 한 자리씩 차지했다. 저녁의 자유시간이 되었을 때는 화투 치자고 지국민과 조재석이 넘어왔고 잠시 뒤에는 너무 조용해서 심심하다며 방을 옮겨온 전영중, 박교진, 우수진까지 모이게 되었다.
평균 키 190의 농구부원들 열 명이-지국민은 아픈 애 혼자 두기 그렇다고 돌아갔다.- 한 방에 모여 과자를 까먹으니, 도때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공태성이 책을 낭독했고 양동이로 들이붓는 듯한 빗방울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강철이가 가는 곳마다 여름을 불러일으키니, 큰 재난이었다. 그것은 이무기의 여의주를 가지고 삿된 방법으로 하늘을 속여 승천하려 하였으나 나무꾼 최정람이 그것을 뱀이라 불러 그것은 사악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게리동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여전히 한양을 도사리며 승천의 기회만 노리고 있다.”
태성이는 다은이가 내미는 제로 콜라를 쥐었다.
“아이씨. 왜 콜라가 미지근해?”
“주는 대로 마시셈.”
다은이는 태성이의 투정을 무시했다.
처음부터 태성이만 책을 읽었던 건 아니었다. 특이한 물건에 대한 호기심으로 너도나도 낱장을 유심이 들여다봤지만, 곧 집중력과 흥미가 떨어져 공태성의 괴담 채널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잘한다 잘한다 해줘야 잘하는 태성이의 성격상 잉여인력 9명이 재미있게 들어주니 독해능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재유는 베개를 등에 받치고 벽에 기대서 새우깡을 먹고 있었다. 마음이 급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특정 부분은 넘겨달라고 하면 찾는 정보가 뭔지 알아달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여기에는 두 학교에서 머리 쌩쌩하게 돌아간다는 놈들이 모여 있었고, 관찰력이나 상황 판단 능력은 코트 밖에서 빛바래는 장점이 아니었다. 그래서 태연한 척하며 책 읽는 거나 같이 듣고 있었다.
“근데 궁금한 거 있어. 왜 가뭄을 불러온다고 할 정도로 강력한 괴물이 고작 지나가던 나무꾼이 자길 뱀이라고 불렀다고 승천에 실패한 거냐?”
박교진은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 중 누가 더 강하냐고 물어보는 초등학생처럼 진지하게 질문했다.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튼 하늘에서 떨어졌다잖아.”
태성이는 잠시 고민하다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평생 기상과 학교와 운동과 수면을 반복한 운동부 학생이 귀신에 대한 지식이 많을 리가 없었다. 끽해야 인터넷에서 사진의 형식으로 떠도는 괴담 정도였고 에니메이션과 만화를 많이 본 상호와 다은이가 그나마 아는 게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의문을 풀어줄 존재가 등장했다. 앓아서 음산한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건 이무기가 승천할 때, 인간이 이무기를 뱀이라고 부르면 승천에 실패한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이지…. 이 의리 없는 것들아, 재미있었니?”
이휘성이 핏발 선 눈으로 원중고 농구부원들을 하나하나 노려봤다.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고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희찬이 다리를 베고 누워 있던 상호가 그 꼴을 보고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같은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너 조용한 데서 편하게 쉬라고 자리 비켜 준 거지. 상태는 괜찮아?”
전영중이 옅게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나 혼자 방에 두라는 소리는 아니었지…! 창밖은 가로등도 없는 산이라 보이는 게 없지, 복도는 깜깜하지. 여기 혼자 있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야, 야. 서서 기운 빼지 말고 일단 누워.”
지국민이 사람들이 슬금슬금 움직여서 난 빈 공간에 챙겨온 이불을 깔고 베개를 놓아주었다. 이휘성은 정말 몸 상태가 안 좋은지 픽 이부자리 위로 쓰러지듯이 엎어졌다. 지국민이이불을 덮어줬지만, 정강이 반절이 튀어나왔다. 키 큰 자의 슬픔이었다.
“점마 멀쩡하다 갑자기 왜 저러노? 허우대도 멀쩡한 아가.”
재유는 준수에게 소곤거렸다. 준수는 아는 바가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휘성이 형이 날씨 안 좋으면 가끔 상태가 개차반이 돼요. 지금 비 많이 오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아픈 건 처음 봐요. 근데 재유 형, 자세가 참….”
조재석이 질문을 들었는지 준수 대신 답해주다 재유의 자세를 보고 질색했다.
“형 지금 되게 아저씨 같아요. 저희 집에서 아버지가 침대에서 티비 볼 때 딱….”
우수진이 끼어들었지만, 아저씨가 리모콘 쥐고 티비 보는 자세로 앉아 있던 준수가 눈을 흘기자 입을 다물었다. 재유는 준수 먹기 편하라고 새우깡 봉지 입구를 돌려주었다.
“자,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이거 한자 뭐냐? 선조? 장천동에서 선조 31년 가을에 일어난 일이다. 벼락틀에 범이 걸려 가죽을 진상했는데, 그해 겨울부터 사람들이 짐승에게 물려가 고을이 텅 빌 지경이 되었다.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높이가 9척이며 검고 눈이 시뻘건 범을 봤다 하였다. 부모님을 뵈러 온 착호갑사 박영헌이 이를 듣고 추적 끝에 호환귀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호환귀는 창에 꿰인 대로 뼈무더기로 돌아갔다. 뼈를 태웠으나 두개골만은 아무리 태워도 기이한 광택만 강해졌을 뿐, 타지 않아 부적과 소금으로 봉했다. 호환에 희생된 사람들 또한 제사를 벌여 넋을 위로했으나 범과의 종속이 끊기지 않은 창귀는 항아리에 담아 무덤을 세우고 대추나무를 심어 표시하였다.”
“장천이면 여기 이름 아이가. 장천 체육시설.”
“맞는 것 같은데? 시내에 호랑이 관련해서 전시해 놓은 박물관도 있데.”
희찬이가 킬킬거렸고 우수진이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책에서는 실제 지명이 등장했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름이 바뀌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 재유는 줄곧 은은하게 긴장한 상태였다. 다들 실사 기반 창작 괴담 정도로 취급해서 다행이었다.
“그거 책 어디서 났어?”
이휘성이 쉰 목으로 물어봤다. 몸 상태가 다소 괜찮아졌는지 일어나 앉아서 원중고 수제 이온 음료를 홀짝거렸다. 재유는 당황했다. 공태성의 대답에 따라 이 많은 사람의 이목이 그에게 쏠릴 수 있었고 그건 정말 피하고 싶었다.
“몰라요. 지나가다가 주운 거라.”
태성이는 재유를 흘끗 쳐다봤다가 잡아뗐다. 이휘성은 허술한 대답을 지적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내용이 특이해서 물어봤어. 강철이 이야기도 그렇고. 호랑이가 죽어서 귀신 됐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어. 창귀가 된 원혼을 봉해서 안치했다는 소리도. 진위 여부와 시기상에 따라 중요한 사료가 될 수도 있어 보이는데 그런 걸 과자 먹은 손으로 막 잡아도 괜찮은 거야?”
태성이는 황급히 손을 티셔츠에 닦았다.
“아무튼 이번 권은 여기서 끝인데 다음 권도 읽어주리?”
“몸 쑤시는 데 마피아 하자. 마피아. 사람 많아야 재미있단 말이야.”
“그럼 일단 다 먹은 과자부터 치우자.”
조재석이 신나서 팔을 휘둘렀고 지국민은 과자 쪼가리를 전영중 입에 털어 넣고 봉지를 구겼다.
공태성은 주섬주섬 주변 정리에 동참하면서 진재유 눈치를 봤다. 오늘따라 재유는 약간 이상했다. 그는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감정의 온도가 일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점심 먹고 왔더니 억장 무너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밖에도 좀 무섭게 느껴지는 기세하며 생기 없는 눈동자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고서와 이유 모를 절박함까지 자고 일어났더니 사람이 딴판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제일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늘 숙소에서 봤던 자세 그대로 퍼질러 앉아있는 모습은 여전히 그가 아는 믿음직한 선배라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 어디서 갖고 오신 거예요?”
공태성은 다 같이 부산 떠느라 정신없을 때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지나가다 주웠지, 그럼.”
재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가 했던 대답을 고대로 돌려주었다.
재유는 놀이판에 화장실을 핑계로 살짝 빠져나왔다. 방 안은 광란의 마피아 여론몰이 정치공작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영중은 신들린 언변으로 준수를 마피아로 몰아갔고 공태성은 신나서 입이 찢어지게 웃으면서 준수에게 투표했다. 흥분한 준수가 왁왁거리며 질러대는 괴성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제일 먼저 죽은 재유는 나오기 전에 전영중과 다은이가 슬쩍 일어나서 다음 희생자로 박교진을 지목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소란스러운 덕에 재유는 주목받지 않고 머리카락 치우는 데 쓰는 청태이프를 챙겨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면서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복도 끝 문에 채워져 있는 옛날 자물쇠의 문양을 살펴보았다. 나오기 전에 창귀가 뭔지 모르겠는데 물어보기 그래서 희찬이에게 핫스팟을 켜달라고 부탁했다. 검색으로 창귀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박(駮)이라는 가상의 동물도 알게 되었는데 생김새가 어디서 본 것 같아 확인하러 왔다. 자물쇠에 새겨진 외뿔과 발톱이 달려있다는 말은 박과 흡사해 보였다. 호질에서 박은 호랑이의 천적이라 하던데 도움이 될까 싶어 자물쇠를 챙겼다.
걸치고 나온 저지를 창문에 데고 넓게 펼쳤다. 비치된 소화기를 휘둘러 창문을 깼다. 이렇게 하면 소리가 안 난다고 하는 걸 주워들었다. 산산조각난 유리 파편이 비산했다. 인터넷에 나도는 정보는 신빙성이 없다는 교훈을 가르치듯, 쨍그랑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났다. 저지가 파편의 대부분을 막아주어 가루가 몸에 튀지는 않았다. 유리 조각 중에서 제일 큰 조각을 챙겼다. 그에게 준수처럼 뒷일 생각 안 하고 조리실에 쳐들어가 식칼을 챙겨올 담력은 없었다. 사람 성격에 절대적인 좋고 나쁨은 없고 그 깡은 준수의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제일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방식을 선택하는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치솟았다.
그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일부러 저녁에 체육관에서 제일 늦게 나오면서 문틈에 손수건 찢은 조각을 끼워 넣어 완전히 닫히지 않게 했다. 그런 노력이 무상하게 문고리에는 자물쇠 달린 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챙겨온 실핀 두 개를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돌렸다. 헤어벤드를 하지 않으면 앞머리가 흘러내려 실핀 몇 개를 늘 가지고 다녔다. 물론, 어디 가서 드러내지 못할 손재주를 염두에 둔 것도 있었다. 다행히 자물쇠는 상당히 구식이라 인내심을 가지고 휘적거리자 열렸다.
문이 잘 닫힌 걸 확인하고, 휴대폰 후레시로 비춰가며 낮에 확인한 부적을 떼어냈다. 어쩌다 하나를 더 찾아서 총 찾은 부적은 6개가 되었다. 청소도구함에서 밀대 손잡이를 발로 밟아 부러뜨려 장대를 만들었다. 이미 창문을 깨먹었지만, 멀쩡한 물건을 부수려니 양심이 여간 아픈 게 아니었다. 비가 억수로 오는 데 발소리만 왜 이리 크게 울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는 청테이프를 감아 막대기에 유리 조각을 연결하고 부적 두 개를 붙였다. 남는 부적은 숙소 방에 나눠 붙일 생각이었다. 김새는 게 부적은 스티커처럼 가져다 대는 대로 착 붙을 거라 은근히 기대했건만 그런 기능은 없어서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으로 붙여야 했다. 영을 해하려면 물리력보다 영적인 힘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라든지, 신통력이라든지…. 그의 성격이 드세고 기 강한 것과는 거리가 머니 부적으로 보충해 보려는 의도였다.
갑자기 섬뜩한 기운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코트 위에서는 이성에 따른 판단보다는 본능에 따라야 할 때가 있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렸다. 발톱이 머리 옆면을 스치면서 귀가 찢어졌다. 뒤를 돌아봤다. 그것이 아쉬워하듯 입가를 시뻘건 혀로 핥고 있었다.
재유는 창을 겨눴다. 그가 믿는 구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저것을 퇴치한 전례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저것의 덩치가 기록된 것보다 작다는 점이었다. 1척을 30센티로 환산하면 9척은 270센티미터인데, 그것은 지금 발끝부터 머리까지의 높이가 2미터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것도 오랜 세월을 거쳐 약화된 것이다. 문제라면 재유도 운동 좀 한 현대 문명의 고등학생이지, 용맹한 장군이 아니라는 점일까.
그것은 이게 뭐냐는 듯, 앞말로 유리 조각을 툭툭 건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낚싯대로 집고양이 놀아주는 꼴이었고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런 급조해서 허접한 도구로 뭐가 될 리가 없었다. 그는 입 안쪽 살을 콱 깨물었다. 정신 차려야 했다. 그리고 생각해라. 방금의 행동으로 확인한 게 있었다. 창의 내구도가 강해졌다. 그것의 발톱이 양철 쓰레기통 뚜껑을 가위로 종이 자르듯 잘라버리는 걸 봤는데, 발톱을 세워 창 끝을 톡톡 내려치는데도 유리 쪼가리는 멀쩡했다. 슬며시 손을 옮겨 부적 붙인 곳을 잡아 보았다. 폰 게임 돌린 휴대폰처럼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오래 버틸 건 못 되어 보였다.
그것의 등 너머로 체육관 대문이 슬며시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국민이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이밀더니 이쪽을 보고 놀라서 몸을 덜컥 떨었다. 재유는 황급해 시선을 돌리며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대체 저 놈이 왜 여길 쳐 들어오는 걸까? 재유는 그것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시선으로 재유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슬쩍슬쩍 앞발을 들이미는 게 사냥감을 어떻게 가지고 놀지 궁리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동물의 청력은 인간보다 훨씬 예민함에도 온통 울리는 빗소리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지국민은 청소도구함에서 뜯어온 것으로 보이는 문짝에 테이프를 감아 손잡이를 단 방패와 오색 술띠가 달린 팔뚝 길이의 삼지창을 들고 있었다. 문짝에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지국민은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킨 뒤 점프하는 시늉을 해 보이고 신발을 벗어 손에 든 채 강당 방향으로 살금살금 움직였다. 재유는 그가 뭘 하려 하는지 알아차렸다. 이 체육관은 각종 조명을 비롯한 시설들을 조작하기 위해 천장에 점검통로가 있었다. 거기서 뛰어내려서 등에 올라탈 생각이겠지.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일어나서 앞발을 휘둘렀다. 창대를 잡고 막았으나 힘 싸움에 밀려 튕겨나가듯 뒤로 자빠졌다. 옆으로 구르며 일어났다. 방금까지 머리가 있던 자리를 발바닥이 짓누르고 있었고 날카로운 발톱이 바닥을 파고들어 구멍이 뚫렸다. 그것이 아가리를 쫙 벌리고 뛰어들었다. 상체를 낮게 숙였다. 머리 위로 그것의 몸체가 스쳐 지나가듯 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천장을 확인했다. 머리 위에 있는 점검 통로에 지국민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재유는 몇 발짝 물러서서 창을 꽉 쥐었다. 그것이 다시 백골처럼 흰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두 발을 어깨 너비로 벌리고, 창대를 쥔 양 손간 거리를 조정했다. 인체를 지탱하는 근육에 의식해서 힘을 줬다. 힘을 주기 용이하도록, 발바닥으로 땅을 단단히 딛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 저 괴물과 이길 수 없는 힘겨루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잠깐만, 잠깐만 저것을 멈춰 세울 수 있으면 족했다.
창대를 그것의 주둥이에 끼워 넣었다. 그것이 창대를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온 몸의 근육이 삐걱거렸다. 신발 깔창이 마찰열로 달아올랐고, 찌이익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버틸 수 있는 건 찰나였다. 균형을 잃은 신체가 뒤로 넘어지려 했다. 그것이 앞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문짝 방패가 추락하며 그것의 정수리를 때렸다. 지국민이 뛰어내렸다.
그것은 자신의 등 위에 뭔가가 올라타자 펄쩍거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지국민은 단련된 하체 근육으로 몸통을 단단히 붙들고 왼팔을 그것의 턱 아래로 밀어넣어 옥죄었다. 오른손으로 삼지창의 손잡이를 잡고 그것의 정수리를 내리찍으려고 했다.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멍하게 흐려져 총기가 사라졌다. 사지에 힘이 풀렸고 지국민은 튕겨져 나왔다. 그는 머리부터 땅에 떨어졌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도약했다. 그것의 발톱은 의식 없는 인간의 숨통 따위는 손쉽게 끊을 수 있었다.
재유는 다급히 주머니를 뒤져 자물쇠를 꺼내 던졌다. 자물쇠는 그것의 머리에 명중했다. 그것은 오이 본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분노는 재유에게 옮겨왔다. 그것은 이제 재유를 노려보며 안면을 야차처럼 일그러뜨리며 고함을 터뜨렸다. 재유는 떨어진 방패를 집어 들었다. 그것이 돌진해 왔다. 휘두르는 발을 방패로 방어했다. 단단하게 감은 테이프 손잡이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뜯겨나갔다. 피할 수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창을 그것의 미간을 향해 찔렀다.
사람의 손이 그것의 이마에서 솟아나 창끝을 쥐었다. 물 속에 가라앉아 있던 사람이 수면에서 솟아나듯, 손, 팔, 머리, 몸통의 순서로 인체의 형상을 이룬 덩어리 두 개가 상체를 일으켰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팔 두 쌍이 창이 그것을 찌르지 못하게 찹찹 잡으면서 타고 올라왔다. 머리를 바짝 들이대며 붉게 충혈된 흰자를 다 덮을 듯이 확장된 시꺼먼 눈동자를 마주쳐 왔다. 주파수가 어긋난 라디오처럼 뭉개진 속삭임이 귀를 메웠다. 그가 검색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상호가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창귀는 사람을 홀려 인간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게 만든다고 했다.
코트 위에서는 잠깐의 망설임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앞발이 재유의 머리를 후려쳤다. 시야가 뒤집어졌다. 마구 뒤집히고 흔들리는 전경 속에서 머리가 없는 스스로의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 넘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커튼이 내려가듯 눈앞이 어두워졌다.
진재유는 다시 숙소의 이불 위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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