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재유승천일지

재유승천일지

으어엌 2026. 2. 14. 21:42

기상호는 지금 눈 둘 곳을 모르겠어서 천장만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동굴 벽을 투명한 몸통 옆면에 많은 다리가 달린 벌레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등에 반지르르한 비늘의 촉감과 그것이 품은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덕분에 급류가 물놀이용으로 입었던 티셔츠를 벗겨갔지만 그렇게 춥지 않았다. 쉬어서 그런지 차가운 계곡물을 양동이째로 들이켜서 축 처졌던 육신에 기력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의 등을 받치고 있는 물체를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라 상호는 심호흡해서 마음을 다잡고 고개만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대한 뱀이 상호를 가운데에 두고 몸을 둥글게 만 채 자고 있었다. 솔직히 뱀이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네 다리가 있었으며 머리에는 봄철에 갓 돋아난 사슴뿔 같은 비췻빛 뿔이 돋아 있었다. 턱과 등줄기를 따라 하늘색 갈기가 나 있었다. 그것은 용과 굉장히 흡사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동양의 신수 말이다.

상호는 멍해지려는 정신을 붙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곱씹었다. 때는 여름방학이었고, 어쩌다 보니 지상고등학교 농구부원끼리 계곡에 물놀이를 가게 되었다. 물은 시원했고 따가운 햇살을 드리운 나뭇가지들이 가려주었다. 거기서 상호는 물살에 휩쓸렸다. 바다 끼고 사는 부산 사람이라고 자만했던 게 실수였던 것 같다.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광경은 울부짖는 희찬이와 달려드는 준수를 붙잡던 다은과 태성 그리고 같이 물살에 뛰어들어 상호를 끌어안던 재유였다.

재유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굴에 사람이라곤 상호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재유가 죽었을 거라는 비관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호는 뱀, 아니, , 어쩌면 이무기의 얼굴을 흘끗거렸다. 그것의 얼굴은 동글동글 귀엽게 생겼고, 그 인상을 한껏 끌어올리듯 까만 콩 같은 코가 길쭉한 주둥이 끝에 콕 박혀있었다. 콧등에는 비늘이 남색이라 잘 티 나지는 않지만, 주근깨가 있었다.

그것의 길이는 재유의 키보다 길었으며, 무게도 더 나갈 게 분명했다. 질량보존의 법칙까지 들먹이기 전에 사람의 근골격이 이렇게 큰 변화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재유와 관련 있다는 정황증거는 하나 더 있었다. 볕 드는 입구 쪽 평평한 돌 위에는 지상고 구 저지가 잘 펴진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재유는 물에 들어갈 때 지상고 구 저지를 입고 있었다.

물론 저것이 물에 떠다니는 재유의 져지를 챙겨왔을 수도 있는 거고, 이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 왜 챙겨왔을까? 선배 유품이라도 챙겨가라고? 져지는 상호의 옷이라 하기에 작아서 혼동할 우려는 적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추모의 개념을 이해할 정도로 지능이 높으며 이종족에게 호의를 베풀 정도로 이타적인 생물인 것이다. 상호는 자신의 상식에 맞게 상황을 끼워맞추려 이리저리 논리를 전개하다 피식 웃었다. 네 발 달린 거대한 뱀이 사실적인 질감을 가지고 존재하는데 기존 상식이 뭐 어떻단 말인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상호는 동굴 입구를 곁눈질했다. 바로 앞에 계곡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로 삼림이 우거져 있었다. 당연히 휴대폰은 없었다. 날은 아직 밝았고, 딱히 위험 요소가 느껴지지도 않았기에 상호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보였다. 굳이 꼽자면 밖으로 나가서 길 잃어 구조대원들 고생시키기? 조난당한 상황이지만 크게 불안하지 않았는데 용 닮은 생명체가 그와 살을 부대끼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광경 덕인 것 같았다.

상호는 자기 허벅지에 기대고 있는 그것의 머리를 내려다보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정수리에 가져다 댔다. 그는 예전부터 재유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싶었다. 태성이 재유 머리 내킬 때마다 쓰다듬는 게 부러웠다. 좋아하는 사람을 마구 귀여워해 주면서 부끄러워서 쳐내지만 내심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게 보고 싶었다. 이게 재유가 아닐 수는 있지만 외모가 유사하기도 했고 머리통이 둥글어서 쓰다듬으면 기분 좋을 것 같았다.

상호는 뿔 사이를 긁어주려다가 얼어붙었다. 그것이 한쪽 눈만 뜨고 상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호는 조신하게 손을 머리에서 뗐다. 그래도 신령한 동물인데 개 긁어주듯 쓰다듬으려 하다니. 신성모독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머리를 치켜들더니 소의 것을 닮은 귀를 쫑긋거렸다. 그것은 일어나서 몸을 부르르 털었다. 남은 물기를 털어내자, 그것의 신체 구조가 변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cg를 입힌 것처럼 주둥이와 허리가 짧아지고 꼬리가 뭉툭해졌으며 비늘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 살색이 보였다. 등을 기대고 있던 게 갑자기 움직여 바닥에 내팽개쳐진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그 광경을 구경하다 이다음 일어날 일을 눈치채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인외가 인간으로 변신한다면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옷을 입고 있거나, 알몸이거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상호는 조심스럽게 눈을 뜬 뒤 바닥부터 위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바짓단이 보여 안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재유가 걱정스럽게 상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상호가 늘 접하던 대로 두 팔에 두 다리를 가지고 이족보행 하는, 대다수 사람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온데간데없었다. 덩치를 생각해 보면 이 짧은 시간에 자취를 감추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었다. 아니, 자취를 감춘 게 아니었다.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있는 생물의 머릿수는 변하지 않았다.

재유는 펼쳐놓은 저지를 더듬거리며 말랐는지 확인하고 몸에 걸쳤다. 이럴 때 클리셰는 크큭. 내 정체를 알았다니, 죽어라.’ 하면서 죽이는 건데. 상호는 용기를 내서 더듬더듬 말을 걸었다. 대중매체에서의 용은 사람에게 우호적인 존재라, 함부로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덕이었다.

, , . .”

사람 왔다. 집 가야제.”

재유가 상호의 말을 끊으며 엄지로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재유와 상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고 주황색 옷이 수풀 사이로 언뜻 보였다. 구조대원들이 기막힌 타이밍에 그들을 찾아냈다.

구조대원에게 구조된 뒤로, 그들은 이현성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희찬이가 울먹거리면서 상호를 끌어안았고, 한동안 다은과 태성은 상호에게 잘 해줬다. 심지어 준수도 상호에게 화를 내려 하다가도 그만두곤 했다. 이 기간이 끝난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상호는 그가 겪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상호는 재유에게 그때 그 용이 본인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체격 좋은 남성 여섯이 사는 숙소에서는 단둘이 있을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막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런 비밀은 남들 있는 데서 물어봤다가는 주워듣는 사람이 있어서 후에 파국을 부르는 게 클리셰였다. 상호는 선배가 국가 연구 기관이나 밀렵꾼 등등의 적대 집단에 잡혀가는 걸 원치 않았다.

상호는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기회가 주어졌다. 어느 저녁, 부원들은 전부 각자의 사정으로 숙소에 없었다. 상호와 재유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적막을 즐기고 있었다. 상호는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면서 재유를 슬쩍 살폈다. 그는 헤드셋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상호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 물어봐야 하나? 그런데 물어봐도 되는 건가? 햄들은 언제 돌아올까? 빨리 오면 큰일인데.

상호. 이리 와봐라.”

재유가 헤드셋을 벗더니 바닥을 두드리며 상호를 불렀다. 너무 티 나게 쳐다봤던 걸까. 상호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가 앉았다.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봐라.”

재유는 흐느적거리던 자세를 바로잡고 똑바로 앉아 상호를 응시했다. 경청의 태도였다. 상호는 우물쭈물했지만, 용기를 내 정말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 저 물에 빠졌을 때 기억나요? 그때 봤던 그거. 엄청 커다란 뱀. 그거 햄이에요?”

그게 여태 궁금했던 기가. , 니한테 확실히 말해준 적은 없으니까.”

재유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다 방의 커튼을 치고 방문을 전부 닫았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는 게 제일 좋겠지. 똑똑히 봐라.”

재유는 확실하게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다는 걸 확인하고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인간의 골격이 사족보행 짐승의 것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허리가 길어지고 팔이 늘어났으며 몸집이 부풀었다. 기괴하다기보다는 마법적이라 신비로운 변화였다. 상호는 이 광경을 정신없이 눈에 담았다.

이윽고, 상호의 앞에 그때 봤던 거대한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 아니 재유는 긴장감도 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게 답이 됐나?”

.”

상호는 재유의 앞발을 자기 손 위에 얹어놓고 만지작거렸다. 상호의 목소리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몽롱했다. 이전과 달리 여유가 있어 재유의 다른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앞발은 사람과 구조가 비슷해 물건을 집기 용이해 보였지만 맹금류와 흡사한 발톱이 달려있었다. 조개껍데기를 닮은 하얗고 큰 비늘이 배를 덮고 있었다. 신체의 비율은 앵무조개의 껍질처럼 보기 좋게 균형 잡혀 있었다. 이 순간 상호는 왜 선조들이 용을 신으로 추앙했는지 이해했다. 또한 그가 재유의 다른 모습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만 뚫어지게 뜯어봐라. 근데 그렇게 안 놀라네?”

. 그게 그럴 것 같아서요.”

재유는 상호가 부담스러웠는지 앞발을 빼냈다. 상호는 넋 나가 있다 정신이 돌아와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심스러운 부분은 많았다. 재유는 가끔씩 푹 젖은 채 숙소로 돌아올 때가 있었고 타로점이나 사주 보는 가게에 같이 가면 가게 주인장이 의아함, 때로는 두려움까지 내비치는 경우가 있었다. 기상청도 틀리는 날씨를 기가 막히게 맞추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게 어떻게 선배가 영물이라는 결론으로 연결되겠는가.

상호는 뒤늦은 깨달음에 몸을 흠칫 떨며 재유에게 멀어졌다. 상호는 재유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릴 때가 있었는데, 왼쪽 어깨에 그러면 소스라쳤다. 그때 짓는 표정이 섬뜩해서 오른쪽에만 그러고 있었는데, 그게 역린 때문인 것 같았다. 용은 역린을 건드리면 그 상대를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린댔는데. 상호는 재유 눈치를 살폈다. 그는 상호를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상호는 재유가 그를 여태 놔뒀다는 걸 토대로 괜찮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머리의 뿔을 만져 보기 시작했다. 뿔은 생물의 골질이 아니라 광물인 듯 반투명한 광택을 띠고 있었다. 이건 성분이 어떻길래 이렇게 예쁜 빛깔을 낼까?

상호가 재유 탐구에 몰두해 있을 때, 현관 키패드 소리가 들렸다. 재유가 인간 모습으로 돌아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상호는 재유의 머리를 끌어안아 몸으로 가렸다. 일단 얼굴만 들키지 않으면, 어떻게 우겨서 이 괴생명체와 재유의 관계를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 뭐야?”

들어온 사람은 준수였다. 그는 놀랐는지 눈썹을 치켜올렸다.

준수햄, 그게 말이죠. 저게 이게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정신 차리니까 있더라고요 하하하. 창문 열어놓은 게 잘못이었나.”

상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필이면 그 무서운 준수였다. 이걸 어떻게 무마하지? 야속하게 재유는 상호의 노력도 몰라주고 그를 앞발로 밀어냈다.

준수 왔나?”

상호 헛소리 하는 거 보면 알려줬나 보네? 아니면 들킨 거야?”

?”

상호는 준수와 재유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준수는 자연스럽게 재유의 허리를 베고 누웠다. 그는 비닐봉지에서 따뜻한 소시지 핫바를 꺼내 재유의 주둥이에 물려주었다. 둘은 아주 친해 보였다. 상호는 준수를 적대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빤히 노려봤다.

뭘 봐?” 준수가 눈을 부라렸다.

준수햄은 알고 있었어요?”

재유 이 모습? .”

준수는 성의 없이 짧게 대답했다. 재유는 꼬리 끝에 달린 터럭으로 준수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간지럽게 뭐 하는 짓이야.” 준수는 재채기가 나오는지 숨을 연거푸 들이키며 꼬리를 붙잡았다.

니 못살게 구는 짓이지. 설명을 길게 해라. 점마 눈 뒤집히려 그런다.”

정말 말해도 돼? 네 일이니까 자세히 말 안 한 거지.”

된다.”

그런데 왜 내가 설명하냐? 네가 해야지.”

준수는 가볍게 투덜거리면서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준수가 재유의 다른 모습을 알게 된 때는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같이 급식을 먹고 교정을 돌아다니는데, 재유가 진지하게 자신이 사실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때 얼마나 황당했는데. 다른 놈이었으면 개소리 하지 말라고 욕이라도 하지 재유 네가 그러니까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때 니 표정 정말 볼만했지.”

그게 눈에 들어와? ? 나만 심각했지?”

내도 심각했다. 그때 막 내가 실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자각이 생겼거든. 그런데 그러면 뭐 하나. 한평생 나는 인간이요 하고 살았는데 퍽이나 와닿겠다. 그래서, 누군가에라도 털어놓고 싶은데 주변에 이런 걸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준수, 니 말고는 떠오르질 않았다.”

그랬어? 근데 나도 네가 변신한 모습 보기 전까지는 실감 안 났긴 해. 이때 내가 상호 너처럼 멍청하게 멍때리고 있으니까 재유가 날 숙소로 끌고 와서 지금 이 모습를 보여줬거든. 네 발 달린 뱀이 숙소에 떡하니 있는 거 보니까 이게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지.”

그렇군요. 그런데 의외네요. 저는 막 재유햄이 태생부터 용이었는데 인간들 사이에 섞여 유희를 즐기다가 어쩌다 정든 준수햄한테만 본모습을 밝힌 줄 알았어요.”

좀 애매한데 태생 이무기는 맞거든? 그런데 이게 신묘한 요술을 부려서 인간으로 변신한 게 아니라 인간 태를 빌려서 태어난 거다. 그렇게 인간으로서 살다가 어느 순간 내가 이무기고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무기요?” 상호는 놀라며 재유의 모습을 다시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훑었다. 보통 매체에 묘사되는 이무기는 큰 구렁이의 모습이건만 재유는 긴 몸통에 다리 두 쌍이 달려 용과 매우 비슷했다. 설정이 다른 걸까?

. 얘 이무기야. 그래서 이번 생에 승천 조건을 만족하면 나한테 용이라고 불러달라 했어.”

그렇군요.” 상호는 자신의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 원인이 재유가 준수에게 용이라 불러달라 부탁해서인지, 재유가 언젠가 승천해야 해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보통 이무기가 승천해서 용이 되면 인간과는 이별해야 하는 게 정석이 아니던가.

그래도 이번 생이라는 조건이 있었으니 여러 번 태어난 듯하고, 생을 반복하는 기준은 인간 몸의 수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서도 재유가 승천의 조건을 충족 못 할 수도 있었다. 상호는 일단 이 문제에 직면하기 싫어 화제를 돌렸다.

근데 되게 최근에 햄이 이무기라는 걸 깨닫게 되었잖아요? 정체성의 혼란 같은 건 없었어요?”

딱히 없었지? 이전에도 계속 위화감이 느껴졌기도 했고 한 번 깨닫는 순간 오래 나돌았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그간 내 삶에서 어쩐지 허전했던 느낌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무기라는 건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해는 서쪽으로 진다는 명제처럼 당연한 거니 그런 쪽 고민은 없었던 것 같다.”

되게 기묘하네요.”

그러고 보니 너 승천하겠다는 건 어떻게 됐어? 엄청 승천하고 싶어 했잖아. 하던 일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지만 거기서 따로 더 해야 할 거 있어?”

, 맞다. 그게 말이지, 승천 조건을 만족한 것 같다.”

? 진짜? 어떻게? 축하해!” 준수가 환하게 웃었다. 반대로 상호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입을 손으로 가려야 했다.

이번에 쌍용기 우승한 걸로 조건을 만족시킨 것 같다.”

그게 말이 돼요?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폭포 밑에서 물 맞고 이슬만 먹으면서 수련해야 하는 거 아녜요? 그렇게 쉽고 편하게 돼요?” 상호는 다급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따졌다.

니는 쌍용기 우승이 쉽냐? 죽어라고 연습하고 운동장 돌고 패턴 외우고 공 던지는 게 쉽냐? 상호, 여태 편하게 살았나 봐? 슛도 없으면서?” 준수가 눈에서 레이저를 쏠 기세로 상호를 노려봤다.

그건 아닌데.” 상호는 발음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물론 쌍용기 우승은 쉬운 게 아니다. 평소 같으면 그 준수에게 이렇게 말을 얼버무리지 않고 넙죽 엎드렸겠지만 이건 참을 수 없었다. 준수는 재유를 못 볼 수도 있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말 똑바로 안 해?”

고만해라. 상호 요즘 정신 차려서 열심히 하는 거 알지 않나. 상호도 준수 앞에서 입조심하고. 우리가 농구를 하면 계속 식단관리도 하고 매일 운동하면서 스스로를 단련하지 않나. 그게 수련으로 인정된 모양이다. 정전하는 분야에서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정점을 찍은 게 승천 조건을 달성했다 본 것 같고.”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되게 편의적이네요. 누군지는 몰라도 만화에서 이렇게 설정하면 욕 얻어먹어요.”

편하면 좋지. 구닥다리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으니 나름 현대화된 거라 생각한다. 요즘 세상에 인간 몸으로 폭포 있는 산골 들어가서 물 맞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그치. 그런 식으로 고생하면 몸 삭아. 그래서 혹시 널 용이라고 불러주는 건 10월달 이후로 해줘도 될까? 나갈 수 있는 대회는 다 나가보고 싶은데 우리 팀은 너 없으면 안 되잖아. 미안해, 약속했는데 미뤄서.”

그게 말이지. 상관없을 것 같다.”

? 하고 싶어 했잖아. 삶의 목표라며.”

물론 하긴 해야지. 그런데 요즘은 수도꼭지만 틀면 뜨거운 물, 차가운 물이 나오고 겨울에는 바닥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찬 공기가 나오는데 이걸 포기하기가 아쉽다.” 재유는 꾸물꾸물 움직여서 에어컨 바람이 더 직접적으로 닿는 자리로 이동했다. 이제는 여름이 끝물이었지만 후덥지근한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게 뭐야. 아주 속세에 찌들었어. 용이 될 이무기가 말이야.” 준수는 재유의 비늘을 마구 긁어댔다. 재유는 대꾸하지 않고 뒷다리를 쫙 뻗으며 스트레칭했다. 찬 공기가 닿는 게 기분 좋은지 꼬리가 살랑거렸다.

이미 승천 조건을 만족해서 떠나갈 일만 남았다는 건 절망적이지만 재유의 태도는 충분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속세에는 자극적이고 좋은 게 많다. 과거의 군주보다 현대의 중산층이 더 잘 산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대한민국의 제2의 수도라 불리는 부산에서 생활하며 현대문명 맛을 본 이무기는 속세에 미련이 많아 보였다. 여기에 빅데이터 시대의 풍부한 문화콘텐츠로 살살 꾀면 눌러앉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유는 노래는 몰라도 드라마나 영화, 만화, 애니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으니까. 상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재유가 승천을 포기하게 하고 연적과의 경쟁에서 이겨보리라. 너무 준수를 뚫어져라 노려봤는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여러 번 자극해서인지 슬슬 진심으로 짜증이 나려는 것 같았다.

뭘 보냐?”

상호는 민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사랑을 하면 겁이 없어진다지만 여전히 준수는 무서웠다. 이길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