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55분경, 떡대 좋고 키 큰 학생들 넷이 평안 고등학교 남자 기숙사 7층에 모여 속닥거리고 있었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고 있어야 할 시간에 나누는 은밀한 대화는 양아치들의 불량한 모임을 연상시켰지만, 내용은 다음처럼 시시하기 그지없었다.
“이 층에 사람 없는 거 맞지?”
“어.”
이휘성이 한 질문에 박교진이 답했다. 정말 사람이 없는 게 맞다면, 그걸 가져올 때가 되었다. 이휘성이 입을 열었다.
“그릇이랑 포크는 누가 가지고 올 거야?”
“나랑 교진이가 갖고 올게.”
지국민의 박교진의 손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렇게 각자 할 일이 정해진 셋이 남은 한 명을 쳐다봤다. 전영중은 의자에 기대앉아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자리 맡아두고 있을게.”
“쟤는 저럴 때마다 좀 얄밉단 말이지.”
박교진이 투덜거렸지만, 남이 일 다 해준다는데 굳이 자신까지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휘성은 과학과 빵의 도시인 대전 출신인데, 본가를 다녀올 때마다 친구들에게 성X당 빵을 사 오는 은혜를 베풀었다. 그는 저번 주에 본가에 갔다 왔는데, 하필이면 이맘때가 공식 청소년 농구 경기가 한 달 남짓 남은 때였다. 빵을 먹다 코치님이나 감독님에게 들킨다면 식이조절 안 하냐고 잔소리를 들을 것이고, 같은 부원들에게 들킨다면 섭섭해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역 명물을 먹 희귀한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다. 이게 그들이 멀쩡한 기숙사 방을 놔두고 꼭대기 층에 있는 공용 휴게실에 모여있는 이유였다.
그렇게 각자 준비물을 가지고 오려고 움직이려는 순간, 휴게실에서 정원 쪽으로 연결된 문이 벌컥 열렸고, 학생 한 명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하복 교복 중 한 종류인 흰 와이셔츠에 회색 넥타이를 매고, 다소 긴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말끔하게 묶은 단정한 차림새였지만 얇은 눈매 때문일까. 어쩐지 인상이 얄미웠다.
“안녕? 여기서 뭐 해?” 그가 밝게 인사했다. 전영중은 모르는 얼굴이지만 인사를 하길래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박교진이 싫은 기색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같이 할리갈리 하려고 왔다. 왜.”
“언제까지 할 건데?”
“점심시간 다 갈 때까지.”
“그래. 재미있게 놀아~.”
그는 싱겁게 인사만 하고 도로 문을 닫았다.
“쟤는 누구길래 아는 척을 하냐?”
“정인우라고 존나 꼬장꼬장한 새끼 있어.”
박교진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가 저렇게 싫어하는 걸 보면 뭔 일이 있긴 한 것 같았다.
“뭐라 하지는 않겠지? 여기 간식 먹어도 됐었나?”
“휴계실에서 공부하면서 간식 먹는 애들 있잖아. 괜찮겠지. …감독님한테 꼰지르면 곤란해지겠지만.”
“아, 몰라. 여기로 나오지 말라고 빌어야지. 다른 데 갈 수도 없잖아? 긱사 방에서 먹었다 애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좆되는 거지.”
지국민은 자기가 꺼낸 말에 지레 겁먹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그 공포를 공유했다. 특히 후배 중 제일 정신 나간 놈인 조재석에게 들킨다면 삐져서 전교생이 그 사실을 알 때까지 난리를 칠 터였다. 그의 말대로, 이제 와서 다른 데 갈 수도 없었다.
아무튼, 전영중은 일꾼들을 잡담 그만하고 빨리 물건 가지고 오라고 쫓아냈다. 잠깐 휴대폰 보면서 빈둥거리고 있으니 곧 돌아왔다. 이휘성은 자기 혼자 들고 올 수 있을 것처럼 말했지만, 양손에 쇼핑백 하나씩 들고 지국민한테 케이크 상자 하나를 안겨놓을 정도로 짐이 많았다. 박교진이 일회용 접시와 포크 네 개를 탁자에 늘어놓았고 이휘성이 쇼핑백 중 하나의 내용물을 털었다. 시나몬 롤, 무화과 그롤아래, 명란 바게트, 메론빵, 사라다빵, 앙버터, 튀김소보루, 보문산 메아리, 소세지빵, 복숭아 타르트 등등이 쏟아졌다. 쇼핑백을 세게 흔드니 마지막으로 상자가 굴러떨어졌는데, 몽블랑 롤케이크였다. 지국민이 들고 있던 상자도 열어 케이크를 올려놓았다. 무너져 내리지 않게 띠지를 두른 생크림 케이크 위로 망고가 듬뿍 올라가 있었다.
이휘성은 빵 중에 튀김소보루 봉지를 뜯었다. 이를 신호로, 일단 이휘성 앞의 접시에 망고 케이크를 잘라 올려주고 각자 원하는 빵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고맙다.”
전영중은 주는 대로 먹는 식성이라 이게 그렇게 맛있는지는 몰랐다. 기왕이면 맛있는 게 좋지만, 빵은 그저 좋은 탄수화물 공급원일 뿐이다. 그래도 몰래 먹어서일까. 소시지 빵의 소시지는 유독 뽀독거렸고 앙버터의 건강하게 달콤한 팥앙금은 눅진한 버터와 잘 어울렸다.
이 중에서 제일 맛있었던 건 망고 케이크인데, 부드러운 케이크 시트 위에 올라간 새콤달콤한 망고가 부드러운 크림의 느끼함을 상쇄해 주었다. 시럽 덮인 망고가 풍성하게 얹어져 있는 시각적 효과에 뒤처지지 않는 맛이었다.
“친구 잘 둬서 이런 호사를 누리네.”
지국민이 명란 바게트를 꼭꼭 씹어 삼키고 말했다. 이휘성이 빵을 다양한 종류로 많이 사 왔기는 했지만, 돌도 씹어먹을 나이인 고등학교 3학년 운동부 학생 넷이 달려드니 빵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휘성은 탁자 위가 좀 비자, 빵 봉지를 전부 뭉쳐 구기고 다른 쇼핑백을 꺼내 내용물을 꺼냈다. 소금빵, 쇼콜라, 초코 튀김소보루, 감자인줄, 고구마인줄, 모카빵, 볼케이노 등이 쏟아졌다. 박교진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빵을 얼마나 사 온 거냐?”
“빵 그 정도 먹어가지고 배가 차겠어?”
전영중은 이휘성의 발언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밥도 아닌데 한두 개 먹어가지고 배가 차겠는가. 급식까지 적게 먹었는데!
“너는 오늘 움직일 생각 하지 마. 쓰레기 버릴 거 있는 사람?”
지국민이 두리번거리는 이휘성의 손에서 봉지 뭉치를 뺏어 들었다. 쓰레기통이 있나 살펴보고 있는데, 휴게실 밖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원예용 수레를 끌고 사람 둘이 내렸다. 일순 농구부원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일행에 정보 교사가 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달갑지 않은 무리는 휴게실 탁자에 벌려 놓은 잔치판을 보고 소곤거리다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별말 없이 가서 다행이었다. 저들이 농구부원이 빵 먹고 있었다는 걸 감독님이나 코치님에게 고해바치기라도 하면 엄청난 잔소리를 들을 것이었다. 박교진이 짜증 냈다.
“도대체 어느 놈이 여기 사람 잘 안 온다고 그랬냐?”
“몰라.”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다 같은 생각을 했다. 다음번에는 그냥 기숙사 방에서 문 잠그고 먹자고.
그들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불청객은 다시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정보쌤.” 이휘성이 휴게실로 들어오는 정보 교사를 보고 엉거주춤하게 인사했다. 박은정은 탁자를 훑어보고 툭 말을 던졌다.
“급식은 어쩌고?”
“쌤도 하나 드실래요? 대신 감독님이나 코치님한테는 비밀로, 아!”
전영중은 눈을 흘기며 쇼콜라를 내미는 지국민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렇게 말하면 가서 일러바치라는 소리였다.
“너희 나이에는 빵이 아니라 영양 잡힌 밥을 먹어야지. 먹고 나면 청소 깔끔히 하고 가라.”
“넵.”
다행히 박은정은 크게 참견하지 않았다. 순간 의아해하는 기색이 스친 걸 보면 그들의 이름도 외우지 못한 것 같았다. 대신 그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그래서 나 힘 자랑하고 싶다, 손.”
“갑자기요?”
“수레가 문에 꼈어.”
“그러게 왜 옆쪽으로 돌아갔어요? 이쪽 문 넓은데.”
“너희가 뭐 먹고 있는데 흙먼지 풍기는 수레를 끌고 갈 수는 없잖아.”
“저희는 아무거나 잘 먹어서 먼지 좀 먹어도 괜찮아요.”
“맞아요.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흙 씹어도 안 죽어요.” 지국민이 빵을 급하게 삼키면서 한 소리에 박교진이 맞장구쳤다.
전영중은 박교진이고 지국민이고 어른 앞에서 헛소리 그만하고 닥치길 바랐다. 이것들은 미성년자인 주제에 소주 걸친 것 마냥 머리에서 나오는 소리를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내뱉었다. 이휘성이 종이컵에 탄산음료를 따라 건네주었다. 확실히 휘성이는 애가 착하고, 멍청한 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말수가 적어서 좋았다.
“저랑 교진이가 도와드릴게요.”
전영중은 자진해서 나섰다. 이대로라면 지국민이랑 박교진이 도와주겠다고 나설 판인데, 내버려 뒀다가는 뭔 개소리를 지껄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너는 이름이 뭐니?”
“박교진이요.”
“너는? 그냥 다 이름표를 가슴 주머니에서 빼라. 영중이는 문으로 나갔을 때 정원 왼쪽 신발장으로 가고, 교진이는 오른쪽 신발장으로 먼저 가있어. 양편에서 수레 잡아서 뺄 거야.”
“알겠습니다.”
전영중은 대답하면서 휴게실에서 정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따가운 여름날의 햇볕이 눈을 찔렸다. 실체 없는 통증과 씨름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햇빛을 듬뿍 머금어 짙은 녹색을 띤 수목과 화단을 감싼 관목이 보였다. 기숙사 옥상 정원은 학업에 지친 학생들이 바깥 공기를 쐰다는 목적에 걸맞게 앉아 있을 수 있는 파라솔 꽂힌 테이블이 두 개 있었다. 그중 오른편에 있는 테이블 벤치에는 꽁지머리를 한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테이블 밑으로 힘 빠진 팔이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붉은 웅덩이가 고여있었다. 비에 젖은 신선한 풀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에 쇠 비린내는 한발 늦게 코를 자극했다.
사람이 저 정도로 피를 흘리는 게 가능하긴 했다. 조재석이 코 깨졌을 때도 피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때 코치님은 조재석의 상태를 살피면서 원래 머리에 상처가 나면 피가 많이 흐른다고 하셨다. 저 애는 아주 피곤했는지 코피를 한 바가지 쏟고도 계속 자는 것 같았다.
전영중은 엎드려 있는 꽁지머리를 깨워서 보건실에 데려다주려고 했다. 박은영이 꽁지머리에게 다가가려는 전영중을 제지했다. 박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안경을 셔츠 밑단으로 박박 닦았다. 전영중은 박은영의 반응에서 두려움, 또는 기묘한 안도감을 느껴 자신의 다리처럼 힘이 빠져 풀리는 혀로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늘어놓았다.
“아, 그게, 저렇게 코피를 많이 흘렸는데도 자고 있어서 깨워서 보건실에 데려가려고 했어요. 후배가 다친 걸 봐서 아는데, 원래 얼굴을 다치면 피가 많이 난댔어요. 어디 얼굴 뼈, 코뼈 가 부러진 걸 수도 있고요. 그때 후배가 진짜 피 철철 흘렸거든요. 쟤도 빨리 병원 데려가야 할 수도 있는데.”
“얘들아. 얘 앉혀놓고 음료수라도 먹이고 있어라.”
“무슨 일 있어요?” 이휘성이 의자를 끌고 와서 전영중을 억지로 앉히며 호기심 섞인 시선을 열린 문밖으로 던졌다. 박은정은 기웃거리는 농구부들을 내쫓고 정원에 나가 꽁지머리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반응이 없자, 꽁지머리의 머리를 돌렸다가 뭔가 발견하고 표정을 찡그렸다. 그는 청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열린 휴게실 문으로 상체만 뺀 채 상황을 지켜보던 이휘성과 지국민에게 지시를 내렸다.
“휘성이는 휴대폰 있니? 당장 경찰에 신고해. 국민이는 우측 신발장으로 가서 네 친구랑 규빈이라고 있거든? 그 둘을 휴계실로 데려와줄래?”
그렇지만 곧 굳이 가서 두 사람을 데려와야 할 필요는 없어졌다. 정원에서 오른편으로 난 문이 열리면서 까무잡잡하게 탄 애가 고개를 내밀었고, 놀란 남자애들을 한 번, 선생님을 한 번 봤다 시체를 보고 우렁차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뭐야 시발! 사람이 죽었어!”
걸쭉한 욕설 섞인 걸걸한 비명이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넋이 나가 있던 전영중은 비명을 듣고 퍼뚝 정신이 들었다. 그렇다. 사람이 죽었다. 그렇게 전영중은 밥 먹고 농구공만 튀긴 19년 엘리트 농구인 인생 처음으로 시체를 보게 되었다.
평안(平安) 고등학교. 박병찬은 학교 이름이 적힌 문패를 올려다보았다. 중학교 때 진학할 고등학교를 조사해 본다고 어머니와 함께 이 고등학교 홈페이지를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홈페이지 대문을 학교 정문 사진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는 정문은 그때 본 사진과 닮은 부분이 없었다. 실물이 더 새것 같은 걸 보면, 디자인을 다시 했으리라.
평안 고등학교는 외관만 봐서는 평범해 보였다. 그나마 이 학교의 비범해 보이는 점이라면 리모델링으로 숨길 수 없는, 건물의 연식에서 느껴지는 역사와 전통 정도일까? 그렇지만 의외로 이 학교는 예체능 쪽으로 좋은 성과를 내기로 유명했다. 학생의 개성을 인정해 주는 개방적인 문화 덕이라 들었다. 지금은 농구부가 꾸준히 전국대회 입상이라는 실적을 안정적으로 낸다는 것만 기억났다. 이런 이유로 박병찬도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 중 하나였다. 성인이 된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방식으로 학교 부지를 밟게 되었지만 말이다.
교문 담벼락 아래에서 말총머리가 걸어왔다. 키만 작다 뿐이지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으며 눈매가 사납고 눈동자가 작아 조직폭력배가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엄연히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이요, 그의 상관인 유미경 경위다. 유미경은 구취 제거 사탕을 혀로 굴리며 옷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다.
“나한테 담배 냄새나냐?”
“안 나요. 그러게 왜 학교로 출동하시면서 담배를 피우셨어요.”
“들어가기 전에 안 피우면 학교 안에서 피울 것 같아서. 요즘 학교는 금연이라면서?”
“그…렇죠?”
박병찬은 말을 흐렸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선생이 피운 건지, 학생이 피운 건지, 다니던 고등학교 뒤뜰 구석진 곳에 가보면 자주 담배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고 접수 내용이 뭐였지?” 유미경이 개인 재떨이에 담배를 넣으며 질문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볼 리는 없고, 박병찬이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였다. 후배를 교육하려는 선배의 의도랄까. 박병찬은 전달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오늘 오후 1시 25분경에 시체를 발견했다고 신고가 들어왔고요,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당 지역 담당 파출소에서 현장을 통제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 잘 기억하고 있네. 사람이 파출소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저기 있다.”
유미경이 운동장 단상 근처에서 고개를 쭉 빼고 있는, 경찰 근무복을 입은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유미경을 보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다가 양복을 입고 있는 박병찬을 발견하고 얼굴이 밝아졌다.
“안녕하세요. 유미경 경위입니다. 이쪽은 이번에 처음 현장 나온 박병찬 순경.”
“하하. 그래서 이 여름에 더운 차림이었군요? 좋을 때입니다. 저는 ■■ 파출소 출신 신영호 경위라고 합니다.”
신영호는 박병찬의 차림을 보고 껄껄 웃었다. 그럴 만한 게, 유미경은 티셔츠에 햇빛 가리개로 남방을 걸치고 있었고, 신영호는 근무복이래도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박병찬에게는 삶의 목표를 다시 잡아준 인생의 은사가 있다. 그분께서 타인은 너를 옷차림을 비롯한 겉모습으로 판단한다며 외모의 중요성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멀끔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 건데, 애 취급하는 반응을 보니 이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상황이 어떻습니까?”
“가면서 설명해 드리지요. 피해자는 이 학교 학생으로, 3학년 2반 정인우라고 합니다. 남자 기숙사 7층 옥상정원에 쓰러져 있는 걸 학생이 발견해서 같이 있던 그 학생 친구가 경찰에 신고,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해 사망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어린애가 죽다니, 안타까운 일이죠.” 신영호는 목적지로 가면서 알아낸 것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다가 사족을 붙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유미경이 덧붙였다. 청소년의 죽음은 나이를 출생 연도로 세는 데 익숙한 이들에게 어떤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 같았다. 갓 성인이 된 박병찬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당시 상황이 좀 기묘했습니다. 남자 기숙사 7층에는 정원이 있는데, 그 정원에는 출구가 휴게실, 왼쪽, 오른쪽 해서 세 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그 세 출입구 전부 지켜보는 눈이 있거나 잠겨 있는 상태였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을 거고, 가서 확인해 보면 명확해지겠지요. 현장에 있던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고요.” 유미정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무렴요. 사람인데 땅으로 꺼지겠습니까, 하늘로 솟겠습니까?”
남자 기숙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가면, 엘리베이터 문에 폴리스라인 테이프가 쳐져 있었다. 내리자마자 엘리베이터 옆의 테이블에 옹기종기 뭉쳐 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있을 곳이 딱히 없어서 엘리베이터 옆에 모여있는 것 같았다.
신영호는 그들을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단서를 수집하고 있었다.
유미경은 정면에 보이는 휴게실로 들어가 정원으로 연결된 반투명 문을 열었다. 따가운 햇살 때문에 잠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눈 위에 차양을 만들어 가며 억지로 눈을 뜨면 잡초도 없는 맨흙이 드러난 화단이 제일 먼저 보였다. 이 때문에 미완성이라는 느낌을 줘도 조화롭게 잘 꾸며놓긴 했다. 요즘 고등학교 참 좋다는 감상도 잠시, 사건 현장이 박병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녹색 파라솔이 꽂혀 있는 테이블 밑에 피 웅덩이가 고여있었다. 끈적한 피가 폭신한 우레탄 재질 바닥재를 흠뻑 적셨고 그게 시신이 여기 있었다는 거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유미경은 수사관에게 건네받은 라텍스 장갑을 끼고 테이블을 훑다가 박병찬을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잘 보니 테이블에 피가 스며있었다.
“혹시 시신이나 당시 사건 현장 찍은 사진은 있습니까?”
“아니요.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피해자 목에 가위가 꽃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요.”
심영호가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찌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손짓에 의하면 목 중앙에서부터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가위가 꽃힌 모양이었다.
“흉기로 쓰인 가위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아무 문방구나 들어가도 팔 법한 흔한 디자인인데 그게 한쪽 날만 피해자 목에 박혀있었다고 합니다. 통짜로 박혀있는 게 아니라.”
“가위는 뽑힌 적 없이 계속 꽂힌 채로 있었던 거죠?”
“아마도요. 구급차에 탑승한 의료진의 말에 따르면 목에 상처는 그 가위로 찔린 것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네 생각은 어때?” 갑자기 유미경이 박병찬에게 질문했다.
“네?”
“피해자가 왜 죽었고 상태가 어땠을 것 같아?”
“음….” 박병찬은 피 웅덩이를 잠깐 쳐다보다 대답했다.
“피를 되게 많이 흘렸네요. 목 지나가는 큰 혈관을 찔린 것 같은데 출혈량이 이 정도면 길게 살아있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렇지. 부검해 보면 확실해지겠지만 아마 경동맥을 찔렸을 거고, 찔리자마자 의식을 잃었을 거다. 가위 날이 뽑히지 않았으니 운이 좋았다면 살 수도 있었겠지.” 유미경은 말을 멈추고 시신을 내려다봤다. 박병찬은 이미 발생한 불행에 희망적인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그런데 현장이 이렇게 피범벅이면 피해자를 찔렀을 때 범인의 옷에 피가 튀지 않았을까요?”
“아닐걸? 가위가 안 뽑혔잖아. 뽑혔으면 물총 쏘듯 피가 뿜어나왔겠지.”
박병찬은 한기를 참지 못하고 목을 만지작거렸다. 피를 이렇게 많이 본 건 난생처음인데 하필이면 흉기가 가위라는 일상적인 도구라 더욱 찝찝했다.
갑자기 희미한 음식물쓰레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인 피 주변을 맴도는 똥파리의 날갯짓 소리의 존재감이 급격히 강해졌다. 여기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죽어 인격이 소멸했고 육신의 흔적이 부패해가고 있었다. 급격히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는 그다지 감수성이 풍부하지도, 정신력이 약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화장실은 밑층에 있어서 참아야 하는데.” 신영호는 안색이 하얗게 뜬 박병찬을 보면서 웃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아요.”
“사람 죽은 걸 처음 보죠? 흔적만 본 거긴 하지만요. 저는 강도살인 사건 신고를 받고 현장에 나간 게 사람 죽은 걸 처음 본 거였어요. 한동안 꿈에 나와서 고역이었죠. 다들 그래요. 이건 제가 졸릴 때 먹는 사탕인데 입에 뭐라도 들어가면 정신 붙잡기 좋을 거예요.”
신영호가 박병찬에게 포장이 노란 사탕을 주었다. 박병찬은 뭘 먹는 걸 즐기지는 않았지만, 사탕이라도 빨아 먹으면 피 썩는 비린내를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바로 입에 집어넣었다. 사탕은 아주 셨다. 사람 정신 차리게 하는 데 좋은 맛이었다. 박병찬은 그제야 유미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유미경은 정원 왼편으로 나가서 신발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정원은 천장 없는 야외다 보니 출입구마다 갈아신을 수 있는 신발을 비치해 두었다. 그는 금방 복도 쪽 문으로 나가 계단 문을 열어보았다. 문은 안쪽에 뭐가 걸린 듯 덜컥거리기만 하고 열리지 않았다.
“이거 안 열리는데? 비상구 문은 못 잠그지 않나?”
“청소도구들이 안쪽에 있는데, 그게 넘어진 것 같습니다.”
어느새 따라온 신영호가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손잡이가 원형이 아니라 ㄴ자인데 거기에 대걸레가 사선으로 걸려 있었다. 유미경은 복도 창문을 내다보고 반대편으로 향했다.
반대쪽 신발장은 신발장에서 복도로 나가는 문에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로 큰 수레가 비스듬히 껴 있었다. 수레에는 흙 포대 여러 개와 모종삽, 원예용 가위 등등이 든 양철 양동이가 실려 있었다. 박병찬은 감탄했다.
“어떻게 했길래 이게 이렇게 꼈죠?”
“그러게 말이다. 수레가 길어서 그냥 건너갈 수는 없고, 이걸 밟고 넘어가야 하는데 이 소리가 다른 데 들렸을까?” 유미경이 창문 밖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균형 잡기 힘들어서 잘못하면 넘어져서 다쳤겠는데요? 그리고 아까 보니까 휴게실 쪽 문은 넓던데 왜 굳이 여기로 온 걸까요?”
“그건 끌고 온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마지막으로 증거품을 확인하고 사건 관계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될 것 같군.”
증거물은 휴게실에 모여있었다. 외부에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증거물인 만큼, 사건 관계자들을 밖에 앉혀놓더라도 벽으로 격리된 공간에 모아둔 것 같았다. 탁자 위에 신발주머니, 휴대폰, 쇼핑백과 케이크 상자 같은 종류가 다양한 잡동사니가 놓여있었다.
박병찬은 저게 뭔가 싶어서 쇼핑백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비닐 쓰레기가 잔뜩 들어있었는데, 남아있는 빵도 많이 있었다. 메론빵, 사라다빵, 모카빵, 복숭아 타르트 등등 빵집 매대에 존재하는 모든 빵을 한 개씩 집어 온 듯 종류가 다양했다. 맨 밑에는 롤케이크 상자가 깔려있었다. 박병찬은 살인 현장에 달콤하고 짭조름한 향기를 풍기는 빵이 있는 게 어이없었다.
“빵이네요?”
“어. 저거 상자는 망고 케이크더라.”
유미경이 케이크 상자 손잡이를 툭툭 건드렸다. 투명한 셀로판지 아래로 흩어진 생크림과 노란 빵 시트, 망고 조각이 보였다.
“야무지게 먹었네요. 누구예요?”
“남자애들이 먹었다는데 확인해 봐야지. 한창 배고플 나이 아니냐. 안 그래?” 유미경이 너도 그렇지 않냐는 듯 박병찬을 쳐다봤다. 박병찬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덩치가 있으니 밥을 많이 먹는 건 맞는데, 먹는 걸 즐기는 성향은 아니다. 밥은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사료인데 맛을 따져봤자 뭐할 것인가. 이 빵들은 설탕이 너무 들어가 체중이 늘기 쉬운, 건강보다 맛을 위한 식품이라 더 달갑지 않았다.
“피해자 소지품은 이게 다입니까? 얘는 수첩에 일정 메모 같은 거 안 한대요?” 유미경이 증거품 휴대폰을 켜보며 질문했다. 휴대폰에는 아쉽게도 패턴 잠금이 걸려있었다.
“네. 그게 전부일 겁니다. 요즘 애들은 다 스마트폰 쓰지 수첩을 안 쓰죠. 그렇지 않나요?” 신영호가 박병찬을 쳐다봤다.
“아, 예. 아마도요?” 박병찬은 다들 메모를 어디다 했나 떠올렸다. 중학교 때 코치나 감독은 수첩에 메모를 했지만, 애들은 메모 같은 거 안 하고 깜빡깜빡하며 살았다.
“피해자 소지품에 신분증 같은 게 없는데 신원 확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교복 가슴 주머니에 이름표가 달려있었고, 남학생 중 머리가 각진 애가 피해자를 알고 있더군요. 그가 정원에 있는 걸 봤다고 했습니다.”
“이거는 어디서 나왔나요?” 유미경이 신발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정원용 실외화 비치대 옆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누가 까먹고 놓고 간 거 아닐까요?”
“실내화든 실외화든 신발을 잊어버리면 신고 다닐 게 없으니까 떠올리고 찾으러 오지 않아?”
“그건 실내화 실외화 따로 두고 꼬박꼬박 갈아신고 다니는 애들 얘기고요. 슬리퍼 신고 다니는 애들은 갑갑하다고 슬리퍼만 신는데 거기서 귀찮다고 신발주머니는 장식이고 삼선슬리퍼 하나만 가지고 다니는 애들 있었어요. 삼선슬리퍼는 실내든 실외든 신고 다닐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정원용 실외화도 슬리퍼였죠. 도난 방지를 위해서인지 뒤꿈치랑 발등에 코팅한 스티커를 붙여놓았더라고요.”
“그리고 여름이잖아요. 덥다고 운동화 안 신고 슬리퍼 신으려고 하는 애들 많아요.”
“알겠어. 디테일을 보니 왕년에 슬리퍼 찍찍 끌고 다녔나 봐?”
“아니요. 슬리퍼는 깔창이 딱딱하고 잘 미끄러져서 못 신고 다녔죠.”
“이런. 미안.”
“하하. 젊은 친구가 벌써 관절 다 삭은 노인이 할 소리를 하면 어떡하나요.” 박병찬은 신영호의 별 뜻 없을 농담에 어색하게 웃었다.
“증거품까지 살펴봤으니 관계자들 증언을 들어봐야겠습니다.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끼리 순서대로 들여보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병찬아, 네가 서기를 해줘야겠다. 옆에 앉아서 진술을 메모해 줄 수 있겠어?”
“네? 알겠습니다.”
첫 번째로 들어온 사람은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유일한 성인인 정보 교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유미경 경위라고 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안녕하세요. 이 학교에서 정보 과목을 담당하는 박은정이라고 합니다. 그밖에는 서버와 데이터베이스, 네트워크 관리를 하고 있어요.”
박은정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공계 직군의 편견대로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경찰서 사이버 수사대 사람들도 셔츠를 입었다 하면 체크무늬던데, 컴퓨터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을 체크무늬가 홀리기라도 하는 걸까. 하필이면 셔츠 색이 빨간색이라 내일은 화요일이니 주황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을까 따위의 잡생각이 들었다.
“하시는 일이 많으시네요? 학교 전산 관련 업무를 다 하시나 봅니다?”
“네. 전산 관리직 팀이 있어서 혼자 다 하는 수준은 아닌데 저도 많이 하죠.”
“그래서 사건 당시 뭘 하셨는지와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박은정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에 동아리 일로 학생이랑 남자 기숙사 7층에 오게 됐어요. 정원 꾸미는 일 때문에 그런 건데, 휴게실에 남학생들이 빵을 먹고 있어서 오른편 출입구로 돌아갔어요.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휴게실에서 정원으로 이어진 출입구보다 복도에서 정원으로 이어진 출입구가 더 작아요. 잘하면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끼더라고요.
규빈이랑 빼보려고 했는데 잘 안돼서 휴게실에 있던 남학생들 도움을 받으려고 저 혼자 휴게실로 갔어요. 거기서 머리가 네모난 학생은 오른편 복도로 보내고 잘생긴 학생은 정원으로 나가서 반대편으로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잘생긴 학생이 정원을 보고 충격받고 넋을 놓더라고요.”
“잠깐만요. 학생들 이름을 못 외우신 겁니까?”
“네. 한 학년에 100명이 넘는 학생들을 다 외우는 건 불가능하잖아요. 얼굴 보면 누군지 짚어드릴 수 있어요.”
그냥 당신이 사람 얼굴을 지지리도 못 외우는 것 같은데. 박병찬은 진술을 메모하면서 속으로 딴지를 걸었다.
“알겠습니다. 이어서 말씀해 주시죠.”
“그때 저도 정원을 봤고, 학생 한 명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걸 발견했어요. 밑에 피가 많이 고여있더라고요. 일단 놀란 학생을 진정시키고, 제가 가서 상태를 확인해 봤어요. 목에 가위가 박혀 있었어요. 이건 명백한 살인미수 또는 살인사건이기 때문에 저는 구급차를 부르면서 학생들에게 경찰에 신고하고 이 층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휴게실로 모아오라고 시켰어요.
119에 신고하면서 상황을 설명했더니 응급처치를 지시했고, 그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진행했어요. 미성년자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니 혼자 하려 했는데 심폐소생술이 생각보다 힘에 부쳐서 투블럭 한 학생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 뒤로 119의 지시에 따라 구급차가 올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계속했어요.”
박은정은 밖에 거의 안 나가는지 피부가 희멀겠다. 헐렁한 셔츠는 그의 신체에 근육이랄 게 없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박병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래서 사람은 운동해야 한다. 사실 그는 외출하기 싫어하고 집을 사랑하는 유형의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실내에만 있으면 갑갑하지도 않나?
“응급처치 당시 피해자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119에서 시키는 대로 호흡을 확인했는데 숨을 쉬지 않았고, 이어 맥박을 짚어봤지만 뛰지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대처를 침착하게 잘하셨네요?”
“취미가 공포영화 보는 거라서요. 담력이 강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하고요.”
확실히 유미경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낌새가 전혀 없었던 걸 보면 배짱이 두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시체를 봐도, 그 순간을 떠올려도, 형사들에게 취조를 받아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서늘한 감정의 온도는 그를 냉담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혹시 7층에 도착했을 때 몇 시였는지 기억하시나요?”
“규빈이랑 1시 10분에 만났으니까 1시 15분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보다 더 됐을 수도 있고요.”
“남학생들이 휴게실에 있어서 돌아가셨다는데 무시하고 갈 수는 없었던 겁니까? 다른 출입구는 문이 작던데요.”
“남학생들이 빵을 먹고 있었다고 했죠? 수레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원예부에서 쓰던 수레라 움직이면 흙먼지가 날려요. 그걸 뭐 먹고 있는데 끌고 갈 수는 없잖아요.”
“원예부라면 정원에 출입한 이유가 정원을 꾸미려고 뭐 그런 이유인가요?”
“네. 제가 원예부 담당 교사지만 원예부에 관련된 건 원예부 부장인 규빈이에게 물어보는 게 정확할 거예요.”
“그러면 우측 복도에서 휴게실로 갈 때 규빈이라는 학생은 뭐 하고 있었나요?”
“제가 도와줄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해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규빈이가 수레를 앞에서 끌었는데 그 바람에 신발장에서 못 나왔기 때문에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그때 선생님의 행적을 목격한 사람도 없다는 의미군요.”
“그렇게 되죠.”
“학생을 데려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기억하십니까?”
“확신은 못하겠는데 5분보다 덜 걸리지 않았을까요? 모르겠네요. 시계를 본 게 아니어서.”
“혹시 사건 당시 비상구 출입구가 열리는지 확인하신 적 있으십니까?”
“건드리지도 않아서 몰라요.”
“마지막으로, 사건에 혹시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부분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잘 모르겠어요. 떠오르는 게 없네요.”
“알겠습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하고, 추가로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면 부르겠습니다. 나가보셔도 됩니다.”
“메모한 거 보여줘 봐.”
박은정이 나가자 유미경이 박병찬을 불렀다. 그는 수첩을 읽어보고 내용을 평가했다.
“잘 썼네. 일단 글씨가 읽을 수 있는 수준은 되고.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하면 돼. 그래서 할 말 있으면 해봐.”
“수상하지 않아요? 싸하다 해야 하나. 너무 차분하잖아요.”
“사람 중에는 사건 직후에는 침착하다가 나중에야 현실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어. 나는 그냥 사람이 맹한 것 같던데?”
“그런가요….”
“그리고 보는 사람이 없었긴 하지만 복도에서 정원으로 이동할 방법이 없잖아. 직감은 중요해. 나는 우리가 은연중에 보고 듣고 느끼는 관찰의 결과가 직감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네가 신중하길 바란다. 우리가 수사를 경솔하게 하면 관련자의 삶이 망가지게 돼. 공권력의 수사할 권리라는 건 무겁고 무서운 거야.
그래서 다음 사람 들여보내 주시면 감사합니다.”
다음 타자는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유미경과 눈이 마주치자 쭈뼛거리며 너 먼저 들어가라며 서로 등을 떠밀었다. 친구들의 등쌀에 못 이겨 투블럭 한 날라리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박병찬은 그들을 보자마자 박은정이 누굴 지칭한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디서 이발했는지 정말 머리가 네모나게 각진 애가 한 명, 안색이 나쁘지만 콧대 뚜렷해서 인기 좋겠다 싶은 애가 한 명 있었다. 투블럭도. 넷 다 키가 크고 근육질인 걸로 보아 운동을 하는 게 분명했다. 특히 깻잎 머리랑 투블럭은 문틀에 정수리가 닿을락 말락 했으니 2미터는 되리라. 배구일까? 어쩌면 농구일 수도 있었다.
투블럭은 유미경과 박병찬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는 거죠?”
“어.”
남학생들이 투블럭을 따라 열중쉬어 자세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평안고등학교 남자 농구부 주장 지국민이라고 합니다. 등번호는 5번이고, 잘 부탁드립니다.”
“3학년 5반 전영중입니다.”
“3학년 3반 이휘성이에요.”
“3학년 7반 박교진이라고 합니다.”
“각자 반 말하는 거였어?”
“그러면 형사님이 니 등번호 알아서 뭐 할 건데, 빡대가리야.”
농구부는 각 잡힌 분위기인지 절도있게 자기소개를 시작했지만, 그 멋이 1분을 못 갔다. 황당해하는 지국민을 박교진이 놀렸다.
“농구부였어? 어쩐지. 일단 의자 가지고 와서 앉아봐라. 너는 키가 몇이냐?”
의자를 가져오려다 난데없이 질문을 받은 이휘성이 나한테 말 걸었냐고 자신을 가리켰다. 유미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답하려 했는데, 하나 있는 의자에 앉아서 친구들를 기다리던 전영중이 이휘성의 대답을 끊었다.
“그 질문은 수사와 관련이 있어서 하신 건가요?”
“아니. 내가 궁금해서.”
“저는 188입니다.”
“교진아. 제발 가만히 있어.”
박교진이 으스대면서 끼어들었다가 전영중에게 타박을 받았다. 박병찬은 전영중에 대한 인상을 수정했다. 몸 단련 잘 되어있고 우직하게 생겨서 성실한 줄로만 알았는데 순 약아빠졌다. 친구들 움직이는데 혼자 앉아 있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너희는 사건 당시 뭘 하고 있었지?”
“빵을 먹고 있었어요.”
“맛있었지. 특히 망고 케이크.” 박교진이 입맛을 다셨다.
“망고 케이크 아니고 망고시루야.”
“어. 그래. 망고시루.”
“…기숙사에 몇 시에 들어왔고 뭐 했는지 시간 순서대로 최대한 자세히 말해봐.”
그러고 보니 우리 여기 몇 시에 모였더라? 1시 거의 다 됐을 때 모였어. 그 뒤에 뭐 했지? 너희들이 빵이랑 포크랑 접시 가져왔잖아…. 벌써 까먹은 게 아니라고 믿어줄게. 안 까먹었다고! 농구부들은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며 기억을 되살렸다. 막는 게 좋지만,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들려서 내벼려두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한 12시 55분인가? 그쯤에 여기 휴게실에서 다 같이 모였어요.”
의견 취합이 끝났는지 지국민이 주장답게 먼저 서두를 열었다.
“휴계실에서 모인 뒤에는 어떻게 됐지?”
“휘성이는 빵 가지러 가고 저랑 국민이는 포크랑 접시랑 컵이랑 챙기러 갔는데…. 맞다! 우리 정인우 봤잖아. 저희가 떠나기 전에 정인우가 정원이랑 휴게실이랑 연결된 문 있잖아요. 거기서 저희한테 아는 척을 했어요.”
“그때 시간이 몇 시였는지 기억하나?”
“아마도 1시쯤이었나?” 박교진은 확신이 없는지 친구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했다.
“1시쯤이었을 걸. 우리 다 모인지 얼마 안 됐던 때고, 너희 간 뒤로 내가 휴대폰 보면서 시간도 봤으니 맞을 거야.” 전영중이 그의 발언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목소리만 들은 게 아니고 얼굴을 확실히 본 거지?”
“네. 저희한테 몇 시까지 있을 거냐고 물어보고 지 있던 자리로 돌아가더라고요.”
“혹시 피해자 신원을 확인한 게 너냐?”
“네. 경찰이 얘 누구냐고 물어보길래 정인우라고 답한 적 있어요.” 박교진이 대답했다.
“친한 사이였어?”
“그건 아닌데….” 박교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숨기지 말고 솔직히 말해.”
“제가 먼저 잘못한 거 가지고 그놈이 짜증 나게 한 적이 있어서…. 너희는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왜 슬금슬금 멀어져? 아니 쓰레기 좀 바닥에 버렸다고 끝까지 쫓아오면서 성질 긁는 게 정상이냐?!”
“그만. 그래서 얼굴을 알고 있었구먼?”
“네. 그런데 하늘에 맹세코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렇군. 피해자를 본 뒤에는 뭘 했지?”
“그 뒤로 저희 기숙사 방 있는 3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어요. 저는 제 방에 사 온 빵을 가지러 갔고, 교진이랑 국민이는 접시랑 포크랑 그런 걸 챙기러 갔어요. 기숙사 구조가 가장자리에 빙 둘러 방이 있고 가운데에 휴게실이랑 전자레인지랑 오븐이 있어 간단하게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휴계실 겸 취식실이 있는 구조거든요. 제가 빵 챙겨오니까 국민이랑 교진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같이 올라갔어요.”
“그러면 전영중 학생은 친구들이 돌아올 때까지 누굴 본 적이 있나?”
“아니요…. 저 진짜 아무 짓도 안 하고 휴대폰만 보고 있었어요.”
“일단 알겠어. 이휘성 학생은 네가 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있나?”
“아니요. 안 보였을걸요? 너희 나 안 보였지?”
“어. 전혀.”
“너도 친구들이 뭐 했는지는 안 보였겠네?”
“그렇죠?”
“저랑 교진이는 떨어진 적 없긴 해요.”
“너희는 물건 챙기는 데 얼마나 걸렸지?”
“5분 넘게 걸린 것 같아요. 분명 접시가 있던 걸 봤는데 어디 있는지 까먹은 것도 있고 휘성이가 문자로 냉장고에서 케이크 가지고 오라 해서 그거 찾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케이크가 김치냉장고 칸 인스턴트 식품들 밑에 묻혀있었다니까요?”
“미안. 다른 애들한테 들킬까 봐 그랬어.”
“그런데도 너희가 먼저 도착한건가?”
“네. 제가 케이크를 아침에 취식실 냉장고에 넣어둔 걸 까먹어서 제 방을 한참 뒤졌거든요. 그거 정리하고 나오느라 늦었어요.”
“너희 셋 중에 이상한 걸 보거나 들은 적은 없고?”
“네.”
“저희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제일 컸어요.”
“그러면 그 뒤로는 어떻게 했지?”
“애들이랑 같이 빵 먹었어요. 그중에 정보 선생님이랑 이규빈이 수레를 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걸 봤어요. 휴게실 문을 안에서 밖으로 봤을 때 오른쪽으로 수레를 끌고 가더라고요. 얼마 안 지나서 정보 선생님이 휴게실로 오셔서 수레가 문에 꼈다고 도와줄 사람을 찾으셨어요. 영중이랑 교진이가 도와주겠다고 했고 영중이는 정원을 지나서, 교진이는 복도 쪽으로 오른편 신발장으로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영중이가 정원 쪽 문을 열고 나서 갑자기 횡설수설하더라고요. 선생님이 영중이 데리고 있으라 하고 정원으로 나가셨어요. 저랑 휘성이도 궁금해서 밖을 봤는데, 누가 엎어져 있었어요. 선생님이 저희를 보고 경찰에 신고하라 하셨고 저는 심폐소생술 하는 걸 도와드렸어요. 맞다. 처음 피해자를 발견했을 때 누가 비명을 질렀는데 이규빈 같았어요.”
“이규빈 학생이랑 아는 사이인가?”
“네. 같은 반이에요. 친하지는 않고 만나면 인사만 하고 다녀요.”
“응급처치할 때 특이하거나 신경 쓰이는 점은 없었나?”
“어…. 목에 박힌 가위가 엄청 아파보였다는 거 정도? 정신이 없어서 잘 생각이 안 나요.”
“경찰 신고는 이휘성 학생이 한 거 맞지?”
“제가 한 거 맞아요.”
“박교진 학생은 이규빈 학생이랑 만난 뒤의 상황을 말해줄 수 있나?”
“오른쪽 복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기준으로는 왼쪽으로 가니 이름이 뭐였더라? 규빈? 걔가 있었어요. 모르는 애라 인사만 대충 하고 수다를 떨지는 않았어요. 수레 앞뒤를 사람이 잡아서 빼낼 거라 들어서 전영중이랑 선생님이 오는 걸 기다렸는데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이규빈이 선생님 어디에 있는지 보겠다고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잠시 얼어붙었다가 비명을 질렀어요. 그 내용 때문에 저도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직접 보지는 못했고요.”
“아직 그때는 살아있었을걸? 왜 멀쩡한 사람을 죽이냐?” 지국민이 소소하게 태클을 걸었다.
“가위에 찔린 걸 멀쩡하다고 하냐? 하여튼 영중이가 저희를 데리러 와서 이규빈이 복도로 넘어올 수 있게 같이 잡아줬어요. 그 뒤 셋이서 휴게실로 와서 국민이는 선생님 도우러 가고 저희끼리 경찰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전영중 학생이 이 층에 있는 사람을 모아 휴게실로 데려온 건가?”
“…저는 교진이랑 여자애 데리러 갔고 다른 복도는 휘성이가 돌아봤어요.”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있나? 인기척이 들렸다 정도도 좋아.”
“없…었던 것 같아요. 휴게실에 있던 사람이 전부예요. 그렇지?” 이휘성이 전영중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고, 전영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궁금한 건데 도대체 왜 학교 본관 놔두고 굳이 기숙사 꼭대기 층까지 와서 빵을 먹은 거냐?”
“다른 놈들이 달라고 하면서 다 처먹으니까요.” 농구부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때깔이 좋아서 엄청 탐낼 것 같긴 했어. 그런데 좀 나눠 먹으면 안 되는 거였냐?”
“형사님은 그러고 싶으세요?” 박교진이 대꾸했다.
“어.”
“형사님은 고딩들이 얼마나 음식을 많이 처먹는지 몰라요.” 이휘성이 투덜거렸다.
“알아. 나도 고등학교 나와봤어, 이놈들아. 세상 사람들이 다 너희같이 위장에 음식물을 많이 욱여넣을 수 있는 줄 알아?”
“쌉가능이던데요….” 전영중이 중얼거렸다.
“하다못해 빈 교실 들어가서 문 걸어 잠그거나 구석진 데서 몰래 먹을 수도 있었잖아. 왜 기숙사까지 온 거지?”
“그건 안전하지 못하잖아요. 선생님이든 학생이든 누가 우연히 지나가다 들키는 날에 저희는 조…, 아니 망하는 거예요. 저건 대전의 성지 성X당에서 휘성이가 저희 생각해서 사 온 거라고요. 성X당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아시죠? 거기 사람 많…”
“그래 알았다. 기숙사 와서 먹자는 의견은 누가 낸 거지?” 유미경이 열변을 토하는 지국민의 말꼬리를 자르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농구부들이 다 같이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이상하거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나? 사소한 거라도 좋아.”
“딱히 없었어요.”
“수사에 협조해 줘서 고맙고 추가로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면 부르지. 나가봐도 좋아.”
“앗싸!”
박교진이 대놓고 좋아하며 뛰쳐나간 걸 시작으로 농구부들은 빠르게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단 한 사람, 지국민을 빼놓고 말이다.
“할 말이라도 있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혹시 가위에 찔린 걔는 어떻게 됐어요? 병원에서 뭐래요?”
“죽었어.” 유미경은 정 없게 한 단어로 사실을 전달했다. 박병찬이 말릴 새도 없었다.
“아…….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보건 실습할 때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나봐요….”
“너무 자책하지 마. 어…. 음…. 사람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린 거니까…. 너는 최선을 다했잖아. 그러면 된 거라 생각해.”
젠장. 박병찬은 상투적인 문장을 내뱉으며 자신의 부족한 표현력을 저주했다. 솔직히 그의 생각으로는 피해자는 죽을 사람이었다. 사람은 1.2리터의 피를 흘리면 죽는다는데 현장에 고인 피의 양은 1리터 생수병 정도 되어 보였다. 그렇지만 이 소리를 애쓴 사람 면전에 대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유미경이 기가 죽은 지국민을 쳐다보다 말했다.
“응급처치할 때 최선을 다했나?”
“네….”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라고도 불리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은 위급한 상태의 환자를 구조하는 과정에서 재산상의 피해 또는 사상을 입혀도 고의가 없는 경우, 행위자에 대한 민형사적 책임을 면책하는 법이지. 그런데 이 법에는 위급한 상태의 환자를 외면했을 때의 처벌 조항은 없어. 너는 외면할 수 있었는데도 양심에 따라 의료 활동을 한 거다.
노력해도, 좋은 의도로 했어도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어. 너는 이번에 그걸 뼈저리게 배웠겠지. 그렇지만 나는 네가 이런 경험을 했음에도 용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농구 경기 같네요. 농구 경기도 최선을 다해도 지기도 하고, 그러면 속상하니까요.”
“그거 비유 괜찮네. 그러면 네 식대로 표현해 볼게. 농구는 6명이 하는 팀 스포츠지? 그러면 다른 팀원들이 전부 구제 불능인데 네가 혼자 열심히 해서 이길 수 있냐? 아니지? 그건 꼴값이지? 마찬가지야. 의료의 ㅇ도 모르는 네가 잘 못해서 누가 죽었고 그런 건 웃기는 소리다 이거야.”
아까의 비유보다는 농구에 빗댄 게 더 이해가 잘 된 모양이었다. 자칫하면 마음에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인데도 표정이 밝아졌다. 아니면 그냥 단순해서인가?
“그런데 형사님. 고칠 부분이 있어요.”
“뭔데.”
“저는 이래 봬도 국대까지 한 몸이라고요. 팀원 한둘이 똥 싸는 것 정도는 캐리할 수 있….”
“나가.”
“넵.”
지국민은 기운 차리자마자 헛소리를 했고 유미경은 그를 얼른 내쫓았다.
“뭘 그렇게 부담스럽게 쳐다봐?”
“방금 경위님한테 연륜을 봤어요.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야 어른인 거군요.”
“뭔 소리야. 너도 나이 먹어보면 어린 애들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게 돼.”
박병찬은 빙그레 웃었다. 세 치 혀로 감동을 줄 수 있는 건 흔한 능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능력은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그의 은사가 그에게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애들이 없이 자란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식탐이 강하지?”
“제 생각에는 음식 욕심 때문에만 저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농구부랬죠? 지금이 6월이니까 전국남녀종별농구선수권대회까지 대충 한 달 하고도 반 남았어요. 굳이 기숙사까지 온 이유가 만약 학교 본관에서 먹다가 교사나 학생한테 걸려서 감독님이나 코치님 귀에 들어가는 걸 경계한 것 같아요. 굳이 자기들 기숙사 방을 안 쓴 이유도 비슷할 거고요. 평안고는 따로 운동부 숙소가 없지만 운동부끼리 가까운 방을 배정해 주는 식으로 배려해 준다고 들었거든요. 자기네 방 드나들다 같은 운동부 애들이나 감독님, 코치님이랑 재수 없게 마주치면 큰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중요한 대회 앞두고 맛있는 거 먹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고? 그걸 우리한테도 말 안 했고?”
“형사가 알면 운동부의 보호자인 코치나 감독에게 알릴 수 있으니까요.”
“끝까지 뭔가 숨기는 것 같았는데 그 이유라니. 맛 좋아 보이긴 했는데…. 참… 정성이다. 청춘이네.”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의 학생이 들어왔다. 피부는 볕에 그슬린 듯 까무잡잡하고 드러난 팔뚝에는 잔근육이 붙어있어 굉장히 건강하고 원기 왕성해 보였다. 그는 유미경을 보고 얼어붙었다가 박병찬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용기를 내 의자에 앉았다.
“이름과 반이 어떻게 되지?”
“이름은 이규빈이고 3학년 1반이에요.”
“사건 당시 뭘 하고 있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여기 들어왔을 때부터.”
“음…. 제 기억대로 말한 거니까 틀렸다고 뭐라 하지 마세요. 점심시간에 미리 정원 꾸미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옮겨놓기로 해서 선생님이랑 같이 남자 기숙사에 오게 됐어요. 그런데 휴게실에서 농구부 3학년들이 빵을 먹고 있는 거예요. 걔네는 위에 블랙홀이 들었는지 음식을 가리는 것도 없이 많이 먹지만 흙먼지를 먹여도 좋다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선생님이랑 어쩔까, 하다가 돌아가기로 했어요. 아슬아슬하게 들어가질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웬걸. 기울여서 들이면 될 줄 알았는데 수레가 중간에 딱 껴버리더라고요. 둘이 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선생님이 허리를 아파하시더라고요. 그 뒤로 선생님이 빵 먹던 남자애들 불러오겠다고 하셨어요. 기다리니까 박교진이 오더라고요. 박교진이 전영중도 온다고 해서 또 기다렸는데 하도 안 와서 제가 정원 쪽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학생을 살펴보고 계셨고, 그 테이블 밑에 피가 어마무시하게 고여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그래서 처음에 죽은 줄 알고 비명을 질렀어요.
선생님이 일단 문 닫고 있으라고 소리 지르셨고 박교진이 진짜 사람 죽었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거 받아주고 있으니까 전영중이 오더라고요. 걔가 여기 우리 둘밖에 없었냐고 물어봤고, 전영중이랑 박교진이 저를 잡아줘서 수레를 밟고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그 후로는 쭉 휴게실에 모여있었어요.”
“그러면 일단 질문. 동아리 일로 왔다고 들었는데 그게 뭐지?”
“그거 좋은 질문이에요. 형사님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있다 생각하세요? 아니죠. 인간은 배만 부르면 되는 짐승들과는 다릅니다.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감각,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됐고, 액기스만 말해봐.”
“네….” 이규빈은 잠깐 프로젝트를 따내는 청년 사업가 같은 패기를 보였으나 유미경이 퉁명스럽게 말을 자르자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원예부는 학교 지원으로 기숙사 옥상 정원에 화단을 조성하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원예부 부장이니까 모범을 보일 겸 학교가 끝나면 바로 작업을 할 수 있게 모종을 제외한 짐을 미리 가져다 놓으려고 한 거예요.”
“원예부에 여자만 있나? 왜 여자끼리 남자 기숙사에 온 거지?”
“남자도 있어요. 3학년은 저 하나뿐이고 2학년 둘에 1학년 셋이거든요? 저희 학교는 고학년부터 밥을 먹어요. 그래서 2학년이랑 1학년 애들은 밥 편하게 먹으라고 안 부르고 선생님만 어떻게 일 진행되나 보여드리려고 같이 간 건데 수레를 같이 끌어주시더라고요.”
아무래도. 어른 된 도리로 학생이 혼자 짐 옮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으리라. 박병찬은 문득 박은정이 보여준 침착함이 안 좋은 체력으로 무리하는 바람에 피곤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어졌다.
“농구부 애들 이름을 알고 있는데 그놈들이랑 친한가?”
“친한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2학년 때는 전영중이랑 같은 반이었고 지금은 지국민이랑 같은 반이라 외운 거예요. 그리고 걔들은 키가 커서 어딜 가나 랜드마크처럼 눈에 띄잖아요. 못 외우는 게 힘들어요.”
“농구부 3학년들 평판에 대해 알려줄 수 있어?”
“그냥 밖에 있는 애들 불러다 물어보시는 게?”
“그놈들은 자기들끼리 너무 친해. 그냥 학교에 도는 전반적인 평판을 알고 싶은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
이규빈은 어떻게 말할지 정리하는 건지 박병찬의 얼굴을 쳐다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일단 지국민은 허세가 있고 키랑 덩치가 큰데 머리카락도 갈색이라 영락없는 양아치거든요? 그런데 한 꺼풀만 벗겨보면 너무 단순하고 순한 편이기도 해서 맹탕이에요. 이휘성은 엄청 착하고 순하고 조용해요. 박교진은 다혈질인데 운동은 사람 때리면 못 하잖아요? 욱할 때가 있긴 해도 알아서 조절하는 것 같더라고요. 전영중은 겉만 봐서는 남한테 공평하게 무심한데 약 오를 때가 있어요. 둘째 특유의 남 짜증 나게 하는 말본새 있죠? 그 느낌이에요.”
“전영중 학생은 외동 아니었어? 하는 짓이 둘째 같지는 않던데.”
“외동 맞아요. 평소에도 얌전해서 얼굴이랑 키 빼면 존재감 없어요. 그냥 걔가 성준수 긁는 거 보면 제 안의 첫째 자아가 요동쳐서 그래요. 남동생이 하는 짓이랑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 짜증 나게 해서.”
전영중에게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인상이 있음. 박병찬은 이규빈의 증언 메모한 페이지 맨 밑 여백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성준수는 또 누구냐?”
“전영중 친구에요. 평안고등학교 양대 미남. 쿨시크 성준수랑 엄친아 전영중.”
“어. 그래. 그러면 혹시 정인우 학생의 평판도 알려줄 수 있나?”
“잘 모르긴 한데 여러 의미로 유명하죠. 신문부 부장인데, 정의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도 좋은 사람이에요. 엉뚱하긴 한데 공부도 잘하고 그래요.”
“정인우 학생이 원한 살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나?”
“정인우는 사진을 잘 찍어요. 그 재주로 학폭 현장을 찍어서 가해자가 처벌을 받게 한 적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렇다면 정인우 학생이 남자 농구부랑 마찰이 있었어?”
“전혀요.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왜. 운동하는 애들 사이에는 똥군기 문제가 흔하잖아. 그게 선을 넘은 적이 있었고, 정인우 학생이 그 장면을 찍었다…. 같은 시나리오로 척을 쳤을 수도 있지.”
“아닐걸요? 맨날 농구부 2학년이 저희 반에 놀러 와서 지국민 귀찮게 하는 거 보면 사이 좋아 보였어요. 아무튼 저는 외부인이라 잘 모르겠어요.”
“농구부 3학년이 구린 짓 했다, 이런 소문도 없는 거지?”
“네. 제가 아는 내에서라면 그래요. 걔네는 원한을 적립하고 있다가 살인을 저지를 만큼 고등하지 못해요. 형사님은 농구부 중에 누굴 의심하시는 거예요?”
“이휘성 학생이랑 전영중 학생.”
“이휘성은 진짜 아니에요. 걔가 얼마나 착한데요. 키 크다는 이유로 사물함 위 먼지 구덩이 쓸게 시켜도 군말 없이 하더라니까요. 전영중은 솔직히 죽은 사람이 성준수였으면 전영중이 힘 조절을 삐끗했구나! 라고 생각했을 텐데 아니잖아요.”
“착한 만큼 뒤에서 음험한 짓을 했을 수 있지.”
“솔직히 저는 그 둘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잘못을 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가요.”
“네 의견은 알겠어. 그러면 너는 박은정 교사가 가고 난 뒤 신발장에 갇혀있었던 거지?”
“네.”
“정원 문을 연 적은 없었고?”
“제가 비명 질렀을 때 빼고요.”
“몇 분 동안 혼자 있었지?”
“5분 정도 됐나? 확신은 못 하지만요.”
“마지막으로 이상하거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나? 사소해도 좋아.”
“아니요, 없었어요.”
“알겠어. 수사에 협조해 줘서 고맙고 추가로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면 부르지. 나가도 돼.”
“혹시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갑자기 왜?”
“아까 학생이 자꾸 제 얼굴 쳐다보길래요.”
“박병찬 순경은 순진한 구석이 있어? 너 잘생겨서 쳐다본 거잖아.”
“네? 그래요?”
“너는 거울만 들여다보면 보이는 상판이니까 감흥 없지? 조금만 있어봐라. 너 좋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트럭으로 실어 날라야 할 거다.”
유미경 경위는 킬킬거리면서 생수병 속 물을 들이켰다. 내가 그 정도로 잘생겼나? 중학교 때까지는 운동에 목숨 거는 애들 틈바구니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는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얼굴이 나쁘지 않다는 정도의 인식만 있었다. 그의 은사님도 나중에 그가 크면 인기 좋을 얼굴이라 한 적이 있는데, 그게 빈말이 아니었던 걸까.
“기분 좋냐? 풋풋하구먼. 수사할 때도 외모는 무기가 될 수 있어. 네가 뭐 물어보면 대부분 간도 쓸개도 다 빼주려고 할걸? 너한테 연애적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준수한 외모에서 오는 호감이 있다 보니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겠지. 오래 써먹게 미리 관리 잘해.”
“근데 외모가 무기라면 경위님은요?”
“나? 나도 외모가 무기 중 하나지. 내 별명이 뭔 줄 아냐? 진실의 상판이야. 이 얼굴을 보면, 사람들은 거짓말을 못 하지. 인간은 쫄면 머리가 안 굴러가서 솔직해지게 되거든.”
유미경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호랑이의 으르렁거림처럼 오금의 힘이 풀리는 미소였다.
“참고인이 겁먹어서 제대로 말을 못 할 때가 있다는 게 문제지만. 이건 노가리 까면서 분위기 풀어주면 되는 거고.”
솔직히 박병찬의 생각으로는 얼굴도 얼굴이지만 형사 특유의 범죄자와 부대끼면서 생긴, 사람 찍어 누르는 기세도 문제였다. 그게 얼굴과 엄청난 시너지를 내니 말이다.
“그러면 현장에 있던 사람들 진술은 다 들은 건가요?”
“어. 끝난 거지.” 유미경은 흐물텅 의자 등받이에 늘어졌다.
“그래서 누가 범인일까요?”
“너는 어떤데?”
“일단 박교진인가? 걔요. 소년범 주변인 증언 들어보면 심심찮게 증언 나오잖아요. 애가 착한데 욱한다고.”
“그렇긴 한데 3층에 있는 내내 친구랑 붙어 다녔다잖아.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니면 알리바이가 있어. 내가 의심하는 건 넷이야. 이휘성, 전영중, 이규빈, 그리고 밑층으로 도망쳤을 수 있는 제삼자.”
“왜요?”
“이휘성은 방에서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없잖아. 그때 비상계단을 통해 7층으로 뛰어갔다 오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운동하는 애라면 4층 정도는 빠르게 주파할 수 있지 않냐?” 유미경이 너는 어떠냐는 듯 박병찬을 쳐다봤다.
“그렇긴 해요. 맨날 뛰어다니는 애들이니까요. 시간 많이 안 걸리고 갔다 올 수 있었겠죠.”
“이규빈은 신발장에 혼자 있었을 때 피해자를 살해한 뒤,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어. 이 경우 손잡이에 지문을 남겼을 수 있는데, 양동이에 목장갑 있던 거 보면 남아있을 확률은 낮겠지. 그런데 굳이 학용품 가위를 챙겨왔다는 거랑, 그걸 사람 목에 꽂을 수 있는 완력이 있었을까 하는 게 신경 쓰여. 범행 가능한 시간이 짧았던 것도 그렇고.”
“찔러보셨어요?”
“고기 손질만 해 봐도 견적 나오잖아. 밑층 도주의 경우 옥상이고, 정원 두 면이 쇠창살을 세워놨다긴 해도 넘어갈 수는 있어서 배관 타고 거기로 도망쳤을 수도 있어. 그런데 옥상 트인 면에는 배관이 없더라.”
“복도 쪽은요?”
“복도 쪽에 배관이 있긴 한데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쇠 파이프 때문에 상체 빼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싶다. 밧줄을 챙겨왔다면 정원에서 도주할 수 있었겠지만 흠….
아무튼 현장에 있던 사람 중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없는 건 전영중 뿐이다. 사건 현장과 인접한 휴게실에 제일 오랫동안 혼자 있었으니까 지금으로서는 제일 유력한 용의자지. 그놈부터 다시 심문한다.”
조재석은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내려갔다. 지금은 수업 시간이고, 조재석은 화장실에 간다는 구실로 교실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물론 교실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교사가 교과서를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는 고요한 복도를 가로질러 컴퓨터실 문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약간 열린 문틈으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업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빔 프로젝터로 발표용 스크린에 메모장으로 자습이라 써 놓은 컴퓨터 화면을 띄워놓았다. 그렇지만 교사도 없는데 학생들이 정숙을 유지할 리가 없었다. 학생들은 무리지어 수다를 떨었고, 주변 소음에 목소리가 묻히니 목청이 더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소수의 학생만이 문제집을 보며 자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수진아, 우수진…! 조재석은 작게 우수진을 불렀다. 그는 뒷문에서 사선에 위치한 자리에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운동하는 학생들은 보통 같은 반에 친구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우수진이 친구가 없는 원인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동글동글 부풀었지만 눈을 찌를 만큼 긴 앞머리, 날카로운 눈매와 안광 없는 눈동자가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다 키도 커서 위협적이었다. 조재석이 덧붙이자면, 그는 음침한 사람이 맞았다. 키가 커서 위압감이 들기까지 하다. 인터넷에서는 입도 사납다. 하지만 여린 구석이 있는 좋은 친구다.
우수진은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서 조재석이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조재석은 허리를 숙이고 살금살금 컴퓨터실로 들어가 우수진의 어깨를 톡톡 쳤다. 그가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다가 조재석을 보고 표정이 밝아졌다. 조재석은 뒷문을 가리킨 뒤 우수진의 팔을 붙잡고 나갔다.
복도에 둘밖에 남지 않게 되자, 우수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가 말하는 ‘무슨 일’이란, 3학년 형들이 농구부 단톡방에 전달한 사건을 의미했다. 남자 기숙사 옥상 정원에서 사람이 죽었고, 범인으로 전영중이 지목된 상황이란다. 그 전영중이! 누구보다 성실하고, 노력해서 3학년에 주전 자리를 따낸 선량한 형이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단다. 조재석이 이 소식을 빨리 접할 수 있었던 건 수업 중에 몰래 농구 경기 동영상을 보고 있어서였다. 그는 수업 시간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수진을 만나러 왔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공유하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나도 몰라. 형들은 왜 거기 가서 안 좋은 일에 휘말리는지. 경기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조재석은 투덜거렸다. 그렇지만 그 어조는 한결 가벼웠다.
“그러니까. 우리 경기 진짜 어떡하지? 형들 다 빠지면 교체 인원으로는 어림도 없어.”
“야. 설마 형들 전부가 대회 못 갈 상황이겠어? 경찰서 왔다간다한다고 연습에 차질 생기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영중이 형은?”
조재석은 입을 다물었다. 전영중은 어떻게 될까? 농구공만 만지며 산 고등학생 2학년은 사법 절차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무지가 불길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러게. 그는 어떻게 될까? 당장 끌려갈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나 볼 수 있게 될까? 아니, 그 전에 전영중이 살인을 저지를 사람인가?
“너는 어떻게 생각해?”
우수진이 불안해하며 물었다. 두서없는 질문이지만 조재석은 우수진이 뭘 물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나 자신이나, 같은 이유로 불안해하고 있었으니까. 과연 전영중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그건 모른다. 전영중은 평안고등학교 남자고등학교 농구부에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 외의 사람에게는 어떤지 모르니까. 그렇다. 조재석은 좋은 형이라 믿었던 전영중에게 배신당할까봐 두려웠다. 우수진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칭 농구부의 분위기 메이커 조재석은 소리높여 말해야 했다.
“지랄하지 말라 그래! 영중이 형이 준수 선배 말고 누굴 잡는다고!”
조재석은 우수진의 경악한 표정을 보고 말실수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입을 틀어막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전영중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소리 같지 않은가. 막 수업 끝나는 종이 울렸다. 학생들이 복도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의 존재감은 금세 묻혔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을지도 모른다. 우수진의 어깨에 손이 내려앉았다. 그가 보고 있던 휴대폰 화면을 길고 얇은 손가락이 내리고 있었다. 목덜미에 숨결이 느껴졌다. 손의 주인은 우수진의 어깨에 턱을 얹다시피 하며 화면의 글자를 자세히 읽고 있었다. 그가 쓴 안경의 알에 남자 농구부 단톡방 메시지가 비쳤다.
“으아악!”
놀라 까무라친 우수진이 비명을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팔꿈치가 턱을 후려갈기는 반동 때문에 안경이 날아갔다.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강아지의 털처럼 보들보들해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에 왼쪽 눈 아래 찍힌 눈물점. 조재석이나 우수진보다 눈높이가 약간 높을 정도로 큰 키에 마른 몸 때문에 길쭉해 보이는 체형. 기상호였다.
컴퓨터 영재 기상호, 도서관 지박령 기상호, 와이파이 따개 기상호. 단연코 그는 평안 고등학교 1학년 중 제일 악명 높은 학생일 것이다. 그는 입학한지 한 달 만에 학교 서버를 터뜨려 징계를 받았고 그러고도 정신 못 차리고 학교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반 애들한테 알려줬다가 또 혼이 났다. 파이의 날에 원주율을 100자리 넘게 외워 기어코 초코파이 한 박스를 받아낸 골 때리는 놈이고 맨날 학교 도서관에서 책 또는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재미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재석에게 기상호란 연습 때 체육관 관객석에서 노트북 끼고 농구부를 구경하는 기분 나쁜 자식이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우수진이 기상호의 안경을 주워다 주었다. 기상호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입 안에 상처가 났는지 침에 피가 섞여 있었다.
“괜찮아요. 그래서 영중이 형이 준수 햄을 죽였다고요?”
“아니야!”
조재석이 발끈했다.
“아까 말씀도 그렇게 하셨잖아요. 단톡방에도 난리 났던데요?”
“남의 휴대폰 화면 훔쳐보는 음침한 자식이 뭐라고 지껄이냐? 대가리 맞았다고 정신도 출타했니? 저리 꺼져.”
“하긴. 준수 햄은 아니겠죠. 그 형이 죽인다고 곱게 죽어줄 위인도 아닌데.”
기상호는 턱을 손으로 짚고 중얼거렸다. 조재석의 짜증은 한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린 것 같은 태도였다. 무심코 우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수의 성질머리는 전교에 소문이 자자했다. 농구부는 성준수가 전영중에게 부리는 패악질의 목격자들이다. 그 얌전한 전영중이 성질부리게 할 정도면 말 다했지 않은가?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읽는 중이었는데, 마저 봐도 될까요? 어쩌면… 전영중 형이 진짜 사람을 죽였는지, 아닌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진짜? 그래서 영중이 형이 어쨌는데!”
조재석은 어깨를 붙잡고 기상호를 흔들었다. 기상호는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조재석은 기상호에게 놀아났다는 걸 깨달았다.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봤다. 단톡방 내용을 훔쳐본 것도 불쾌했고 이놈이 보이는 태도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기상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물렸다.
“정 그렇다면 그때 사건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선배들 형들이 흥분해서 열 내는 내용밖에 못 읽었거든요.”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에이. 어차피 선배들이 예민하게 구는 건 전영중 형이 사람 슥삭했다는 소문 날까 봐 그런 거죠? 저 친구 없어서 소문낼 데도 없어요. 그러니 알려줘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 건지 우수진이 딱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누가 봐도 기상호는 기상호는 친구가 희소할 것처럼 생겼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조재석이 계속 침묵을 유지하며 기상호를 압박하자, 결국 우수진이 입을 열었다. 야! 조재석이 놀라서 우수진 정강이를 살짝 걷어찼다. 그렇지만 그는 조재석의 만류에도 설명을 그만둘 마음이 없어 보였다. 머리가 아팠다. 안 그러던 애가 오늘따라 대책이 없었다. 저 숫제 사기꾼 같은 놈의 뭘 믿고 그러는지. 조재석은 기상호를 째려봤다. 그는 우수진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눈초리가 뾰족하고 눈동자가 살짝 위로 떠 있는 삼백안이 날카로운 기운을 풍겼다. 그게 지성일지, 야바위일지 직접 검증해 봐야 하는 처지라는 게 내키지 않을 뿐이었다.
기상호가 우수진의 설명을 요약했다.
“선배들 형은 같이 논다고 대충 1시 5분 전에 남자 기숙사 7층에 모였어요. 그 뒤 1시쯤에 살아있는 피해자를 목격했고, 보드게임을 챙기러 전영중 형만 남겨놓고 각자 방에 들렀다는 거죠? 그 뒤로 보드게임을 하는 중에 원예부가 수레를 끌고 가다 우측 출입구에 걸렸고, 그걸 치우려다 시체 발견. 사건 흐름이 이렇게 되네요.
확실히 알겠어요. 전영중 형은 범인이 아니에요.”
기상호가 이를 드러내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조재석은 1년간 숙식을 같이한 의리가 있으니, 일단은 전영중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누군가 전영중의 무죄를 선언해 주니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오금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우수진을 붙잡아 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저 말을 간절히 듣고 싶었다.
“그래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단톡방에 경찰이 입수한 증거물이 뭐가 있는지 물어봐 주실 수 있나요.”
“엥? 왜?”
조재석이 의아해하면서 일단 물어봤다. 이 형들은 휴대폰만 붙잡고 있는지 바로 답장이 날라왔다.
“신발주머니랑 원예용 수레랑 스마트폰 있었데.”
“그거 말고 다른 증거물은 없었나요?”
“그런 것 같아. 형들이 꼼꼼하지 못해서 빼먹었을 수는 있지만.”
“흐음…. 알겠어요. 그러면 전영중 형을 구하러 가볼까요?”
“어…. 우리가 구하러 가야 하는 거야?”
“네?”
기상호가 조재석을 괴이쩍게 쳐다봤다.
“영중이 형이 사람 안 죽인 게 확실하다면서. 경찰이 수사 잘 하지 않겠어?”
“이 형이 순진한 소리를 하네? 지금 그 작자들한테 전영중 형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 조져야 하는 대상이에요. 솔직히 형이 무고하다 해도 짭새들한테는 딱히 상관없을걸요? 그 자식들한테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실적이니까요.”
기상호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얼핏 눈동자 속에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들끓었다.
“아…. 미안.”
조재석은 얼떨결에 사과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상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감정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냈다. 가만히 있던 우수진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너는 분명 영중이 형을 도와주려 하고 있어. 그렇지? 그런데 왜 도와주려 하는 거야? 너 형 알아? 아무 상관없는 남이잖아.”
기상호는 잠시 고민했다.
“형이 농구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거든요.”
우수진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기상호가 먼저 말을 잘랐다.
“아무튼 준비물을 마련하러 가보죠. 우수진 형은 저한테 맞는 교복 재킷 가져다주실 수 있나요? 조재석 형은 1학년 6반에 가서 정희찬한테 제 반으로 와달라고 전해주세요. 비쩍 마른 애 있어요.”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선배들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바탕 그가 휩쓸고 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조재석과 우수진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적이 흐르고, 조재석이 어이없어했다.
“쟤 아무래도 좀 많이 이상한 것 같아.”
우수진이 조재석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1학년 교실은 컴퓨터실 있는 층보다 한 층 아래에 있었다. 평안 고등학교는 학년별로 층이 분리되어 있었다. 여긴 1학년들의 구역이었다. 학년을 드러내는 초록색 이름표를 보고 지나가던 1학년들이 그를 흘끗거리거나 속닥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형들 사이에서는 귀여움받는다 해도 대한민국 평균보다 월등하게 큰 키와 체격은 농구부 밖에서는 위협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기 학년도 아닌 층을 돌아다니고 있다면 말이다.
조재석은 창 너머로 교실을 들여다보았다. 5대5 앞머리를 한 갈색 머리가 책상에 걸터앉아 반 친구들과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활기찬 언동에서 사람을 끌어모으는 매력이 느껴졌다. 그는 명실상부한 6반의 중심이었다. 그 점에서 남극과 북극처럼 기상호의 정 반대편에 있는 인간 유형처럼 보였다. 기상호는 농담으로도 사교성이 좋아 보인다고 말할 수 없는 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저 갈색 머리가 ‘정희찬’임이 분명해 보였다. 키는 큰데 허벅지는 지국민 팔뚝만 해서 발목이랑 손목이 이쑤시개를 꽂아놓은 것처럼 얇았기 때문이었다. 조재석은 복도 창문을 열고 갈색 머리를 불렀다.
“네가 정희찬이야?”
“네. 전데요?”
정희찬이 서글서글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선배가 와서 말을 걸어서인지 그와 떠들던 학생들의 얼굴에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기상호가 널 찾아. 자기 반으로 오라던데?”
“걔가요? 알겠어요.”
정희찬은 어떤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조재석이 전달해 준 지시에 따랐다. 도리어 조재석이 정희찬에게 질문해야 했다.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봐?”
“상호한테 가면 설명해 주겠죠.”
“많이 친한가 봐.”
“네. 중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에요. 제가 그놈이랑 제일 친한 친구라고요.”
“…한두 번 이런 게 아니구나?”
“그놈이 적당히 엉뚱해야죠. 그런데 선배까지 막 부려 먹을 줄은 몰랐네요.”
“우리가 아쉬운 입장이라….”
조재석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고. 어쩌다가 그놈한테….”
정희찬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재석을 불쌍하게 쳐다봤다. 그는 순간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되었다.
“뭐. 그놈이 엉뚱해서 그렇지 능력은 있으니까요. 수습 못 할 사고 칠 놈은 아니에요.”
정희찬이 조재석을 위로했다. 하지만 어쩐지 대형 사고를 쳐서 일을 더 크게 벌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정희찬은 1학년 2반으로 들어갔다가 내부를 보고 폭소했다. 조재석도 창문 너머로 정희찬이 손가락질하는 곳을 쳐다봤다. 기상호가 같은 반 학생에게 턱을 붙잡힌 채 화장당하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는 필요 없는데….”
상호가 애처롭게 웅얼거렸다.
“시끄러워.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겠냐? 밑색부터 깔아야 줄을 긋든지 말든지 하지!”
기상호는 제법 잘 놀게 생긴 상대의 기에 눌린 건지 더 입을 놀리지 않았다. 진로를 미용 계열로 잡은 건지 책상에는 3단짜리 메이크업 박스가 올라와 있었고, 상자에서 적절한 화장품을 꺼내 기상호의 얼굴에 칠을 했다. 조재석이 화장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더 마법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자, 다 됐다. 어떠냐?”
상호의 얼굴에 거울을 대주었다. 기상호는 어색해하며 거울을 돌려가며 얼굴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결국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짱이야. 대단하다.”
호들갑은 주변 사람들이 더했다. 조재석이 감탄했고 정희찬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화장 솜씨는 근사했다. 기본 위생만 지켰을 뿐이지 후줄근하게 생긴 고등학생을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럽게 화사한 얼굴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현대의 미용 기술이란 이처럼 대단한 것이었다.
“아, 맞다. 잠시만.”
화장을 해줬던 학생이 뭔가 떠오른 듯 무릎을 치더니 펜을 꺼내 기상호의 왼눈 아래 점을 찍었다.
“이제 진짜 됐다. 니 얼굴 포인트는 눈물점이지.”
“캬. 기상호 니는 오늘 세수하지 마라. 니 인생에 이렇게 인물 날 일이 얼마나 있겠나.”
정희찬은 웃겨서 죽으려고 했다. 뒤늦게 재킷을 가지고 나타난 우수진도 기상호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가 재킷을 건네자 기상호가 걸쳐봤다. 옷이 한두 치수 큰 듯 보였지만 어색하지 않게 입을 정도는 되었다. 사이즈를 고려하자면 박교진이 의자에 걸쳐놨거나 사물함에 처박아 둔 교복 검사용 재킷을 가져온 것 같았다.
“상호! 이쪽 봐봐라. 확실히 낫네. 어때요, 선생님?”
정희찬이 자식 사진 찍는 어버이마냥 기상호를 부르다 자연스럽게 다음 교시 수업을 하러 오는 교사를 끌어들였다.
“그래. 상호야. 교복 똑바로 입고 다니니까 얼마나 좋니. 그래서 희찬이는 반 돌아가서 수업 들을 준비 해야지. 거기 2학년들도 남의 반 구경 그만하고.”
아 맞다 수업. 조재석은 그제야 쉬는 시간이 끝나간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음 수업이 뭐였더라? 아니, 영중이 형은 어쩌고?
“상호도 자리에 가서 앉자.”
기상호는 살살 교사의 눈치를 봤다. 이미 같은 반 학생들은 교과서를 꺼내 자리에 앉은 뒤였다. 정희찬이야 웃는 낯으로 상호가 어떻게 할지 구경하고 있었지만 조재석과 우수진은 교실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기상호가 돌연 허리를 90도 꺾어 인사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기상호는 우렁차게 사과를 외치더니 냅다 도망쳤다. 정희찬이 당연하게 그를 쫓아갔다. 우수진과 조재석은 오도카니 남아 그들이 뛰어가는 뒷모습을 쳐다봤다. 기상호가 수업 탈주한다! 교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상호가 돌아와 그들을 데려갔다. 등 뒤에서 들리는 환호성이 더 커졌다. 1학년 2반 반장이 기막혀하며 물었다.
“저놈 잡아 올까요?”
“뭘. 가끔 수업 듣고 싶지 않은 날도 있는 법이지.”
교사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인자하게 웃으면서 출석표에 기상호, 결석이라 체크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연륜은 못 이기는 법이다.
사실 조재석은 어딜 가나 제정신 아니라는 평을 듣곤 했다. 물론 소속 집단의 훈훈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스스로도 본인이 그렇게까지 정신이 박혀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했던가. 그는 오늘 자신보다 한 술 더 뜨는 놈을 만난 것 같았다.
기상호가 남자 기숙사 정문에 설치된 개찰구 앞에 서서 우수진과 조재석을 쳐다봤다.
“…설마 기숙사 문 열어달라고 우리를 데려온 거야?”
“에이. 그럴리가요. 그것만 해달라고 할 건 아니에요.”
기상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재킷 주머니에 꽂힌 비X500이 들썩거렸다. 방금 전 기숙사 편의점에 들려 산 거였다. 도대체 뭘 시키려는 것이며, 뜬금없이 음료수는 왜 산 것인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의문이 연이어 떠올랐다. 기상호가 조재석이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시고 싶으세요? 드리기는 힘든데.”
“아니. 전혀. …도대체 음료수는 뜬금없이 왜 산거야?”
“이건요, 증인의 입을 열게 할 「뇌물」이랄까….”
기상호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정희찬이 그 꼴을 빤히 쳐다봤다.
“와 그리 처다보노.”
“아니…. 니가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어디 내놓기 참 쪽팔리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희찬의 솔직한 속내를 들은 기상호는 명치를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비틀거렸다. 정희찬은 그를 무시하고 조재석을 재촉했다.
“일단 형들이 경비가 뭐라 하기 전에 개찰구 열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정희찬이 보안관실 쪽을 가리켰다. 학교 보안관이 창문 너머로 그들을 수상쩍게 쳐다보고 있었다. 막 수업 시작한 시간에 학생 네 명이 기숙사를 얼짱거리는 건 눈에 띄었다.
“경비 아니고 보안관 아저씨야.”
조재석은 한숨을 쉬면서 학생증을 찍었다. 평안고등학교 학생증은 요즘 학교 학생증답게 교통카드, 체크카드 등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 중에는 기숙사와 같은 학교 시설 출입증 기능도 있었다. 조재석 뒤에 딱 붙어서 개찰구를 지나가는 정희찬의 행동은 보안관이 기어코 창문을 열고 그들을 지적하게 만들었다.
“거기 학생. 학생증은 어디다 놓고 왔어?”
“죄송합니다. 준비물 놓고 온 게 급해서 깜빡하고 학생증을 놓고 왔어요.”
“그걸 놓고 오면 어떡해? 다음부터는 꼭 가지고 와.”
“넵.”
저런 학생이 있었나? 보안관이 혼잣말하며 창문을 닫았다. 우수진과 같이 개찰구를 넘어온 기상호가 조재석에게 물었다.
“원래 저렇게 꼬장해요?”
“어. 이번에는 봐주신 거지 평소에는 한 소리 들어.”
“그러면 학생증 놓고 오면 어떻게 하나요?”
“돌아가서 갖고 오거나 안 볼 때 몰래 넘어야지.”
“보안관이 자리를 자주 비워요?”
“점심시간에는 밥 드시러 가. 그 밖에도 건물 순찰 돌거나 하면 자리에 없으셔.”
“그렇군요. 그러면 개찰구 넘어다니는게 꽤 흔하겠네요?”
“음… 그런가? 잘 모르겠어. 들키면 혼나는데 굳이?”
“아냐. 할 놈은 할걸? 당장 형들도 귀찮다고 넘어다녔었잖아.”
조재석이 우수진의 말을 정정했다. 학생증에 기능이 많다 해도 가지고 다니기 귀찮아하는 사람은 늘 있었다. 실수로 놓고 올 때도 있고 말이다. 그럴 때, 기숙사생들은 보안관 눈치를 보다 몰래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이상한 이유로 넘어다니는 사람도 존재했다. 지국민이라든지. 개찰구 넘는 게 멋있다고 폼 잡았던 적이 있었다. 결국 개찰구 통로 유리판에 발이 걸려 바닥에 턱을 찧은 뒤로는 얌전하게 지나다니게 되었다.
“아무튼 이쪽으로 와. 기숙사에서는 무조건 실내화…. 아.”
조재석은 신발장 문을 열다가 깨달음의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야 실내화를 신고 밖을 돌아다녔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필이면 오전에 비가 와서 신발에 흙탕물이 묻어있었다. 정희찬이 현관에 깔린 매트에 실내화 바닥을 닦아내고 어색하게 웃었다.
“닦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이미 늦었는데 어쩌겠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잖아.”
그렇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갑자기 뭔 꿍꿍이속으로 이러는지 모를 놈을 따라 무단결석했다는 현실이 뼈아프게 와닿았다. 물론 몸이 교실에 있어도 정신은 콩밭에 가 있긴 했다. 하지만 매우 성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엘리트 스포츠이다. 그 근면함이 지금은 있어야 할 장소에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기상호가 조재석이 빈 신발장 문을 도로 닫는 걸 지켜보다 질문했다.
“그런데 그러면 기숙사생은 따로 신발장이 있으면 신발주머니를 기숙사 내에서는 어떻게 보관하나요? 본관에서도 신발을 갈아신어야 하니 아예 안 들고다닐 리는 없을텐데요.”
“보통은 기숙사 들어올 때 신발 갈아신고 신발주머니 째로 신발장에 집어넣어. 왜?”
“별 거 아니에요. 경우에 따라 잘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찾는 게 있는데…. 아. 저기요!”
기상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휴게실에서 막 나오는 청소부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수고 너무 많으세요~.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기상호는 청소부에게 싹싹하게 인사하며 사온 음료수를 건넸다. 청소부는 성가시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손자뻘이 붙임성 좋게 애교를 부리며 선물을 건네니 귀찮음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기상호는 이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청소하실 때 기숙사 7층은 어떻게 돌아보시나요?”
기상호는 언제 찍어뒀는지 모를 기숙사 7층 지도 사진을 휴대폰 화면에 띄워 들이밀었다. 청소부는 희한한 놈 본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동선을 짚었다.
“이렇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왼쪽 복도 쓸고 정원 들어가서 쓰레기 줍고 쓰레기통 꽉 찼나 확인하고 오른쪽으로 나와서 마지막으로 휴게실 청소하지.”
“일반적으로 몇 시에 7층을 청소하게 되나요?”
“딱히 때가 있나? 보통 기숙사는 아침에 출근해서 1층부터 청소하니까 10시쯤 가게 돼지. 그 뒤로는 틈틈이 돌아다니면서 이곳저곳 치우고 다니는 거고.”
“혹시 분실물이 발견되면 어떻게 하시나요?”
“경비실에 맡겨.”
“오늘 발견된 분실물이 있었나요?”
“없었지.”
“친절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기상호는 상대가 귀찮음을 참다 못해 그를 쫓아버리기 전에 적절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일행에게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저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조재석이 중얼거렸다. 우수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기상호의 생각을 알 법한 놈을 쳐다봤다. 정희찬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건 저도 저놈이 말 안 해주면 몰라요. 확실한 건, 상호는 언제나 생각한 뒤에 사고를 친다는 거죠.”
거 참 자랑이다. 조재석은 갑자기 형들이 그리워졌다. 자신을 보는 그들의 기분이 지금 같았을까? 저놈을 무작정 따라온게 아주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문득 들었다. 이래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지 않으면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거구나.
어쩌겠는가. 이미 수업을 빼먹었는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기상호가 우수진이 7층 눌러놓은 버튼을 해제하고 도로 6층을 눌렀다.
“옥상은 7층이야.”
“알아요.”
기상호는 6층에서 내려서 복도 끝으로 향했다. 정희찬이 그를 가로막았다.
“상호. 혼자만 가지 말고, 니가 뭘 하려 하는지 설명을 해라.”
“내가 말 안 했나?”
“하나도 안 했지.”
기상호는 그제야 아차 싶은 눈치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쇼를 할 거예요. 저에게는 확실히 전영중 형이 범인이 아니라는 근거가 있어요 하지만 뇌 굳은 짭새들이 후출근한 고삐리가 떽떽거리는 걸 귓등으로라도 듣는 시늉이라도 할까요? 철밥통 짭새들이 무시할 수 없게 하려면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분위기를 몰아 기선을 잡아야 해요.”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꾸밈을 했구만?”
“어. 이런 자리에서는 형식이 중요하니까. 재료도 준비 다 됐어. 이제 요리하기면 하면 돼.”
“혹시 선배들 머리 좋아요?”
조재석은 잠깐 고민하다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수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조재석도 스스로가 멍청하지는 않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려면, 형들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 선까지만 까부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날그날 컨디션과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이 무형의 선을 가늠하려면 눈치가 있어야 한다. 물론 성적은 특출나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부머리와 진짜 머리는 다르지 않던가?
“경찰은 7층에서 사람들을 심문하고 있다 해요. 거기 들어가서 전영중 형이 무고하다는 걸 증명하면 앞으로 전영중 형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거예요. 제가 짭새들 앞에서 설명할 때, 제가 하는 말에 집중하고 있다가 적절히 반응해주시면 돼요. 이런 자리에는 바람잡이가 있어야죠. 아마 6층에서 7층 올라가는 길목을 경찰이 지키고 있을 거야.”
“내가 경비를 쫓아주면 되는 기가?”
“어. 부탁할게.”
“맡겨만 줘라. 내가 발이 얼마나 빠른데. 그 정도야 껌이지.”
“어…. 음…. 그러니까…. 지금 지키고 있을 경찰을 따돌리고 7층에 진입하겠다는 거지? 그 뒤에 경찰들 앞에서 너희들이 지금 틀렸다고 조목조목 따질 거고?”
우수진이 당황해서 살짝 문장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충 그렇죠. 이해 잘 하셨는데요?”
“경찰 개쪽준다는 소리잖아.”
“그게 어때서요?”
조재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자식은 제정신이 아니다. 공권력을 정면으로 들이받겠다는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 하고 있었다. 더 끔찍한 건, 우수진이 거기에 그럴싸해한다는 거였다. 아. 맞다. 이놈도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지.
“야…. 진심으로 이게 맞는 거야? 좀 아닌 것 같아….”
“뭐가 아닌 것 같은데요?”
“경찰한테 그러는건 좀….”
“공권력한테 개기는 것 같아서 기분 이상하다고요? 아니면 어른한테 덤비는 것 같아서 찝찝해요? 근데 선배도 전영중 형이 범인으로 몰린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공권력이 무조건 옳지 않아요. 공자도 어른을 무조건 공경하는 게 아니라고 했고요. 사람은 항의할 줄 알아야 해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분석적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감독님도 틀릴 때가 있지 않는가. 사실 항의의 방식이 이상하다는 점을 지적해야 마땅하겠지만 이 때의 조재석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조재석이 설득당한 것 같자 기상호가 정희찬을 불렀다.
“그럼 부탁한다.”
“오케이~.”
정희찬은 엄지와 검지를 붙여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이곤 주머니에서 헤어밴드를 꺼내 머리에 썼다. 그가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고 얼마 안 지났을 때, 흐릿하게 웅웅 울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평안고등학교 신문부 정희찬이라고 합니다. 혹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뭐야? 학생이 여기 오면 안 돼! 저리 가! 그 뒤로 일방적으로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렸고, 소란스럽게 우당탕거리다가 도로 조용해졌다. 기상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비상계단은 고요해서, 철문이 마찰하는 마찰음이 뚜렷하게 들렸다.
“아무도 없네요. 자. 이제 가죠.”
“……네 친구 괜찮겠어?”
우수진이 당혹스러워했다.
“네. 희찬이는 발이 진짜 빨라요. 배 나온 짭새는 절대 못 따라잡죠. 저것도 잘 쫓아오라고 설렁설렁 뛰는 거예요.”
그 쪽으로 괜찮냐고 물은 게 아닐텐데. 잡히지 않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사건 현장에 난입하러 가는 그들만 할까. 이제 와서 발 빼기도 늦었기 때문에 조재석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뭐. 죽지는 않겠지!
의외로 7층 비상구 바깥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엘리베이터 쪽이 다소 소란스러웠다. 가 보면 정보 교사인 박은정이 휴게실 문을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항의하고 있었고, 지국민이 농구부 대표로서 거들고 있었다. 형들 반에 놀러 갈 때 몇 번 봤던 3학년 선배가 팔짱을 끼고 이 광경을 불만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조재석을 발견하자, 놀라서 입을 벌린 채 급하게 이휘성의 등을 두드렸다. 이휘성이 왜 건드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기상호 일행을 발견했다. 그의 입도 턱이 빠질 만치 쩍 벌어졌다. 이휘성은 입을 억지로 닫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가 어쩌자고 여길 왔어! 아니, 어떻게 들어온 거야? 수업은 어쩌고? 빨리 돌아가!”
“영중이 형 걱정되는 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이휘성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조재석이라면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넘어갔겠지만, 저 말을 한 건 우수진이다.
“그래서 영중이 형은 어떻게 됐어요?”
조재석이 재촉했다.
“모르겠어…. 못 나오고 있네.”
이휘성의 눈썹이 침울하게 쳐졌다. 그가 휴게실을 흘끗거렸다. 휴게실의 반투명한 유리 벽은 소리가 흘러나오긴커녕 안쪽의 물체들이 흐릿한 덩어리로만 보였다.
아무리 눈에 안 띄려고 해도 키가 2미터를 넘으면 조금만 움직여도 몸짓이 눈에 띄기 마련이다. 항의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며 묵묵하게 문을 지키던 경찰들이 불청객이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경찰이 호통쳤다.
“너흰 뭐야?! 당장 나가! 여긴 관계자 외 출입 금지다!”
“형들! 이 사람 들여보내야 해요!”
조재석이 기상호의 등을 떠밀며 외쳤다. 같은 코트 위에서 공을 주고받은 사이에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경찰이 기상호 일행에게 손을 뻗었다. 지국민과 박교진이 슬그머니 스크린을 서서 그들을 가로막았다.
“비키지 못해?!”
경찰이 화를 냈다. 하지만 그들보다 적어도 머리 반 개 이상 큰 학생들의 방어를 뚫을 수는 없었다. 박교진은 한술 더 떠서 소리 지르는 경찰들 앞에서 얄밉게 휘파람 불며 딴청을 피웠다.
기상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사람들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틈바구니에 생긴 폭풍의 눈에 섰다. 안경을 벗어 재킷 앞주머니에 꽂고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가슴과 허리를 곧게 폈다.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머금고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며 외쳤다.
“전영중 형은 범인이 아니에요.”
휴게실 중앙의 탁자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형사로 보이는 두 사람 맞은편에 학생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전영중이었다. 어깨는 처량하게 처져 있고 당당했던 등은 구부정하게 수그러든 채였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그새 겪은 마음고생을 드러내듯 잘생긴 얼굴은 평소 두르고 있던 무던함이 벗겨져 나가서 초췌했다. 조재석은 약간 울컥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전영중의 목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형! 왜 얼굴이 반ㅉ….”
조재석은 감동의 해후를 나누려다가 강렬한 열기를 느끼고 고개를 천천히 맞은편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인세에 강림한 마귀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인상이 분노로 흉악해졌고,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당겨지면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유미경이 으르렁거렸다. 조재석은 목숨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전영중 옆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수첩에 뭔가 열심히 적고 있던, 젊고 훤칠하게 생긴 형사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겁먹어서 눈치만 보고 있는 조재석은 무시하고 얄밉게 멀뚱거리는 기상호를 붙잡아 내보내려 했다. 키는 비슷했지만, 손등의 힘줄이며 떡 벌어진 어깨가 둘 사이의 골격근량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아이잉~.”
힘은 지혜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기상호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깜찍하게 교태를 부렸다. 박병찬은 역겨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경멸스럽게 쳐다봤다. 그 틈을 타 기상호는 붙잡힌 팔을 빼내며 외쳤다.
“지금 경찰은 아주 큰 실수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 저한테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어요? 낯부끄러워서 못 들고 다니기 전에 고쳐주러 온 건데.”
“개소리하지 말고, 나가. 자식아.”
박병찬은 약이 한껏 올랐는지 기상호를 억지로 내보내려고 했다.
“그, 그게 뭔데?”
우수진이 손을 살짝 들며 질문했다. 그는 기상호가 당부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가 적절한 때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가 싱긋 웃었다.
“여기에 없는 요주의 인물이 한 명 더 있어요. 그리고 그 증명은 신발주머니가 해 줄 수 있고요.”
기상호가 증거물을 모아둔 탁자를 가리켰다. 탁자 위에는 확실히 신반주머니처럼 보이는 천주머니가 있었다. 박병찬이 짜증 냈다.
“그만 짖고, 일단 나가라고! 환장하겠네!”
“신발주머니가 왜? 그럴 수 있는 거 아냐?”
조재석이 교과서 읽는 것처럼 어색한 투로 말했다. 이규빈이 그 주장에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현했다.
“그러니까. 누구는 연습경기 날 유니폼 놓고 왔는데. 신발주머니 정도야.”
박교진이 히죽거리다 입술이 댓 발 나온 조재석의 눈총을 받았다. 박병찬은 뒤늦게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 순간 사건 관계자들이 전부 휴게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농구부들은 벽에 도열해 있었고 지칠 대로 지친 박은정까지 이규빈이 끌고 온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말 없는 동의 속에 일단 뭔 소리를 하는지 들어는 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박병찬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 빌어먹을 놈만 쫓아내면 질서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골칫덩어리를 힘으로 쫓아내려고 할 때, 섬찟한 시선이 느껴졌다. 앞머리가 버섯갓 같은 학생이 스마트폰으로 박병찬을 촬영하고 있었다. 경찰이 시민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게 동영상으로 남는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손을 뗐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가지고 다니기 얼마나 귀찮습니까? 옥상 정원은 기숙사 내에서 유일하게 실외화를 신어야만 하는 곳이죠. 그러니, 어느 덜렁이가 신발주머니를 놓고 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건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보죠.
일단 신발주머니가 발견된 장소부터 짚어봅시다. 이게 어디서 발견됐죠?”
기상호가 박병찬을 공손하게 가리켰다. 박병찬은 어이없어했다.
“경찰이 수사 결과를 일반인에게 막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거 참 깐깐하네. 헹.”
박교진이 인중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너 뭐라 했냐?”
“형사님이 알려줄 생각 없다면 저희끼리 추측해보죠. 여기서 신발주머니 본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동선을 고려해보면, 있을 곳이 대충 왼쪽 신발장밖에 없겠네요. 비상계단은 제외합시다. 비상계단에 놓여 있는 신발주머니는 누가 봐도 수상하니까요. 그렇다면 신발장에 신발주머니가 있을 수 있는 경우는 뭐가 있을까요?”
“생각할 게 더 있냐? 기숙사 왔다가 놓고 갔겠지!”
박병찬이 짜증 냈다. 그는 이제 기상호를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 하는 듯했다.
“네. 그 말이 맞아요. 근데 저희 더 자세히 생각해 볼까요?”
“그래봤자…. 기숙사 살던 애가 옥상정원에서 노닥거리다가 까먹고 갔다는 것밖에 더 되겠어?”
조재석은 최대한 머리를 굴린 뒤 대꾸했지만, 나온 대답은 궁색했다.
“네. 맞아요. 기숙사에 사는 누군가가 칠칠맞게 옥상정원에 들렸다가 신발주머니를 놓고 갔다. 그렇게 보는 게 제일 타당하겠죠. 하지만 그 경우, 신발주머니는 옥상정원 신발장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청소부의 증언에 따르면, 매일 아침 10시쯤, 7층의 옥상정원을 가로지르며 청소를 한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발견된 분실물은 분실물로 보안관실에 맡겨집니다. 그리고 오늘 발견된 분실물은 없죠. 그러니 신발주머니는 오늘 10시 이후에 놓인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이상해? 그냥 들렸을 수도 있지. 나도 옥상정원 화단 기획한다고 기숙사 자주 들락날락했어. 그러다가 이 꼴 났지만.”
이규빈이 푸념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침 시간 끝나고 점심시간 전의 애매한 시간에 기숙사에 들러야 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침대에 눕고 싶어서? 교실 책상이랑 의자는 낮고 작아서 찌뿌둥하다고.”
지국민이 투덜거렸다.
“물건 놓고 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땡땡이쳤거나.”
박교진이 나름 생각하다 의견을 내놓았다.
“맞아요. 하지만 그 모든 이유는 10분밖에 안 되는 쉬는 시간에 기숙사, 그것도 옥상정원을 드나들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옥상정원에 노는 애들은 꽤 있어. 시험기간 되면 거기서 바람 쐬면서 공부도 하고, 그래서 내가 옥상정원에 화단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걸. 그런 애들이 놓고 갔을 가능성이 없을까?”
“그 경우, 어제 옥상정원을 들렸고, 신발주머니를 놓고 갔어야 하니 오늘 아침에 발견되어 분실물로 수거되었겠죠. 그리고 이 점을 고려하면 신발주머니의 존재는 더 기괴해집니다. 이 신발주머니의 주인은, 기숙사생이 아니거든요.”
아! 우수진이 깨달음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숙사생은 기숙사 안에서는 신발주머니를 들고 다니지 않아…!”
“맞아요. 자세히 설명해 보죠.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신발주머니를 들고 다녀요. 실내에서는 실내화를 신어야 하니까요. 기숙사도 예외가 아니에요. 본관에서는 신발주머니를 교실 책상 옆에 걸어둡니다. 기숙사에서는 신발주머니를 어디다 보관할까요? 바로 정문 현관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신발장입니다. 기숙사생들은 신발장에서 실외화를 실내화로 갈아신고, 신발주머니는 신발장에 집어넣습니다.”
이휘성이 공손하게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어. 해도 될까?”
“네.”
“기숙사 살아도 신발주머니 들고 다닐 수도 있어. 당장 내가 그렇거든. 신발 사이즈가 커서 신발을 넣으면 신발장 문이 안 닫혀. 그래서 늘 신발주머니를 들고다녔어. 지금은 귀찮아서 억지로 쑤셔 넣지만.”
“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 하는 줄 알아?”
박병찬이 기막혀했다.
“외부인이 놓고 간 거라 네 친구 건 아닐 거라며. 그런데 거기다 데고 ‘기숙사생도 놓고 갈 수 있어요’라고 하면 어떡해? 네 친구 편을 들어야 하는 거 아냐?”
“아.”
이휘성은 그제야 자기 실수를 깨달은 듯했다. 하지만 기상호는 개의치 않았다.
“좋은 질문이에요. 사정이 있어 기숙사 내에서도 늘 신발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기숙사생이라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렇다면 일단 실발주머니에는 실외화가 들어있어야 해요. 여기는 기숙사 내부고 신발을 갈아신어야 하니까요. 마침 오늘은 오전에 비가 와서 땅이 젖었어요. 실외화라면 신발에 진흙이나 물에 젖은 모래 같은 게 묻어있겠죠. 그래서, 묻어있던가요?”
“…아니. 없었어.”
이번에는 박병찬이 순순히 대답을 해줬다.
“그런데 그러면 더 이상해지는 게 아닌가? 기숙사에서 실외화를 신고 다녔다는 거잖아.”
지국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이상하지 않아요. 신발주머니의 주인은 기숙사 내에서 실외화를 신었어요. 여기서 나와야 할 질문은 ‘왜’입니다. 왜! 기숙사 안에서 실내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여기서 기숙사 내에서 유일하게 실외화를 신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을 떠올려야 합니다. 네. 옥상정원이요. 당연히! 옥상정원에는 실외화가 제공됩니다. 옥상정원에 실외화가 제공되는 이유는 신발장까지 왕복해서 실외화를 가져오는 수고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신발주머니를 들고 있다면, 익숙하지 않아 어색한 공용 실외화보다 개인 실외화를 신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그 경우가 신발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기숙사생이라는 소리의 반박이 되지는 않잖아.”
우수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제 그에게는 논리의 검증이 더 중요했다.
“아니요. 가능합니다. 여기서 편리함을 다시 따져봐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여쭤보겠습니다. 조립식 신발장에 꽂혀 있는 슬리퍼를 신는 게 더 편할까요, 신발주머니에서 실내화를 꺼내 신는 게 더 편할까요?”
“당연히 그냥 꽂혀있는 거 신는 게 편하겠지. 근데 말이 바뀌었잖아.”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셔야죠. 말한 대로, 신발주머니의 주인은 비치된 슬리퍼를 신는 대신, 굳이 신발주머니에서 신발을 꺼내 신었습니다. 이게 의미하는 건 단 한 가지. 그가 기숙사에 익숙하지 않다는 겁니다. 초대받지 않은 공간에 왔기 때문에 기숙사 슬리퍼를 빌리기보다 자신의 물건을 사용했던 겁니다.
정리하자면, 이 신발주머니의 주인은 기숙사 외부인이며, 10시부터 사건 발생 이전까지 7층 옥상정원에 출입했거나 출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신발조차 도로 갈아신지 못한 채 물건을 놓고 갔군요. 경찰은 정녕 이게 사건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수상한 인물이 떡하니 있는데, 전영중 형을 범인으로 모는 게 적절한 행동입니까?
이상. 신발주머니의 논리였습니다.”
기상호가 과장되게 팔을 크게 벌리며 인사했다. 신장에 비해 긴 팔 때문에 동작이 더욱 극적으로 보였다. 그의 연극적 변론에 걸맞는 마침표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 광경을 홀린 듯 멍하게 쳐다보고 있던 전영중 앞으로 기상호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저 잘했죠?”
기상호가 베시시 웃었다. 초신성처럼 반짝거렸던 영웅이 그에게 쓰다듬받길 원하는 강아지처럼 굴고 있었다. 전영중은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그제야 기상호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몸만 크지 아직 젖살이 남아 고등학생보다는 중학생처럼 보이는 얼굴. 분칠을 했지만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를 빼면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이목구비. 기상호는 꽤 평범하게 생긴 학생이었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비범함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걸까?
전영중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박병찬은 울상을 지으며 유미경을 돌아봤다. 유미경은 살짝 넋이 빠진 채 입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멀건 대낮에 귀신을 본 것 같기도, 과거에 빠져 현재를 보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경위님…?”
박병찬이 조심스럽게 유미경을 불렀다. 그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고, 난장판이 된 상황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군. 고삐리가 수사 현장에 쳐들어와서 깽판을 다 쳐놓고 말이다.”
쇠를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축제처럼 들뜨고 온화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유미경이 기상호를 똑똑히 노려봤다.
“네 주장은 잘 들었어. 그런데 너는 용의자의 뜻을 알고는 있나?”
“네. 용의자는 범죄에 있어서 범인으로 의심이 되지만, 범죄행위가 드러나지 않아 범인으로 지목되지는 않은 사람을 일컫죠.”
“그래. 잘 아네. 용의자는 본격적인 수사 진행 전에 추려낸 범인 후보군이라 할 수 있지. 이제 수사가 진행되면, 수사기관이 공식적으로 심문을 하는 사람을 피의자, 범죄 혐의가 인정되어 기소된 사람을 피고인이라 하게 돼.
전영중 학생을 따로 심문한 건, 그가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 중 제일 확실하게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세한 증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어서였어. 그는 용의자지, 피고인이나 범인이 아니야. 그런데 너는 우리가 전영중 학생을 범죄자로 단정한 것처럼 말하는군. 어디서 이야기를 이상하게 들은 거냐, 아니면 네가 멋대로 착각한 거냐?”
조재석과 우수진은 바로 선배들을 쳐다봤다. 분명 형들은 전영중이 큰 위기에 처한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유미경이 지국민, 이휘성, 박교진을 차례차례 노려봤다.
“니들이냐?”
“아니 용의자면 범인으로 본 거 맞지 않나요……?”
지국민이 소심하게 구시렁거렸다.
“국민아…. 그때는 아니라고 부정해야지….”
“너희 셋은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리고 거기 처음 보는 두 명. 너희들이 이 쪼다들 후배냐?”
“아닌데요?”
우수진이 겁먹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뭐가 아니긴 아니야. 걸치고 있는 져지 디자인이 같은데. 개그하냐? 너희들도 남아.”
“네?!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몰라서 물어?”
조재석이 매우 억울해하며 외쳤지만, 유미경의 서슬 퍼런 시선과 맞닥뜨리자 바로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온순해졌다.
“마지막으로 아까 생쇼 한 애! 너는 진짜 도대체 무슨 정신머리냐?”
“왜요. 아무 사람이나 대충 잡아넣어서 땡 칠 수 있었는데 못 해서 아쉬워요?”
기상호가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사람이 많아 복작거리던 휴게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수사 현장을 휘젓고 다닌 데다 경찰을 도발하기까지 하다니. 이곳에 있는 모두가 기상호가 선을 넘었음을 알았다. 누군가 딸꾹거렸다. 뒤늦게 이휘성이 기상호의 입을 막았지만, 뱉은 말을 주울 수는 없었다.
유미경이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지그시 기상호를 노려봤다. 기상호는 눈싸움하다가 슬그머니 지국민 뒤로 숨었다. 지국민이 소곤거렸다.
“야. 왜 하필 내 뒤냐?”
“형이 제일 든든해 보여서….”
“그러게 숨을 거면 왜 깝친 건데.”
지국민은 불편한 티를 내며 슬금슬금 옆으로 비키려 했지만, 기상호가 그의 뒤에 딱 붙어 나오지 않았다.
“너는 이름이 뭐냐?”
“………김다은이요.”
기상호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다 답했다. 조재석과 우수진은 깜짝 놀라서 기상호를 쳐다봤다. 왜 엉뚱한 이름을 말한 걸까?
“기억하지. 그래서 네가 내 심기를 더 건드리지 않으려면 이제 뭘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
“뭔데요?”
“꺼져, 이 새끼야. 더 밍기적거리면 유치장에 처넣어 버릴 줄 알아.”
유미정이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누가 봐도 그는 진심이었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기상호는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쳤다. 유미정이 손가락으로 눈 밑을 문지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기상호는 1층 로비 1인용 소파에 삐뚜름하게 누워있었다. 그가 엘리베이터 내리는 조재석 일행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굴러떨어지듯 일어나서 달려왔다. 그새 세수했는지 얼굴에 물기가 남아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진짜 기다리고 있었네? 잘 끝났어. 여기 영중이 형도 데리고 왔고.”
조재석이 전영중의 손목을 잡고 팔을 들어올렸다.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전영중은 조재석이 자신의 손을 흔드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경찰이 선배들한테는 뭐 물어봤어요?”
“형들이 똥군기 잡았냐고 물어보던데? 웃겨, 정말. 근데 왜?”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하여튼 너 되게 대단했어! 그런데 영중이 형이 범인이 아니라는 건 진짜 신발주머니 때문에 알았어? 우리가 카톡 보여주자마자 알아차렸잖아. 그 짧은 순간에 눈치챈 거야?”
조재석이 기상호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당연히 대충 아다리 맞춘 거죠. 뭔 놈의 신발주머니 가지고….”
“그럼 뭔데?”
“간단해요. 조재석 선배가 전영중 형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조재석 선배가 살인을 저질렀어요. 그렇다면 경찰이 선배한테 그때 혼자 있었을 때 뭐 하고 있었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면 선배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음…. 그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고 하든지 했겠지?”
“그거죠. 최소한 누군가 계단 쪽으로 가는 발소리가 들렸다고 했겠죠. 그런데 선배 형들이 증언을 조합했을 때, 형들이 우리 말고 제삼자가 있었던 것 같다고 안 했잖아요? 전영중 형이 자기가 혼자 있었을 때 누가 있었다, 누가 왔다 갔다 한 것 같았다는 소리를 안 한 거겠죠. 그래서 전영중 형은 범인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어요.”
“진짜 그게 다야?”
“네.”
“뭔가 허무하네…”
우수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근데 영중이 형이 의심을 피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 않은 거라면?”
조재석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기상호는 전영중의 얼굴을 돌아봤다가 다시 조재석을 쳐다봤다.
“전영중 형이 생각을 두 번 꼬아서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아.”
조재석이 동감의 탄식을 내뱉었다. 전영중은 저 두 놈 다 쥐어박고 싶었다. 믿어준 건 고마운데, 왜 면전에서 멍청하다고 욕을 얻어먹는 기분이 드는 걸까.
“아무튼 가요! 늦게 오면 쌍쌍바!”
조재석이 우수진을 데리고 통통 뛰어갔다. 전영중과 기상호만 남겨졌다. 전영중이 쭈뻣거렸다. 어색해서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후배들이 내려오면서 네 이야기를 했어. …일단 고마워.”
“뭘요, 헤헤.”
“그런데 너는 왜 그런 거야?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농구부도 아니고, 우리들이랑 친한 것도 아니야.”
“그야 저는 형이 계속 농구하는 걸 보고 싶거든요.”
“진짜 바라는 게 그거밖에 없어?”
“그러면 형 덩크 하는 거 보여줄 수 있어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요.”
“그 정도야. 나중에 체육관으로 오든지 해.”
“앗싸~.”
전영중은 별생각 없이 신나 하는 기상호를 보다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기상호는 그가 덩크 하는 모습을 이전에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저놈이 그걸 언제 본 걸까?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없을 때 팀원들이 덩크 해달라고 부추기곤 했다. 짐작 가는 게 그럴 때밖에 없을 텐데 그걸 봤다고? 그러고 보니 남자 농구부에서 연습할 때마다 구경하러 오는 변태에 대한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기상호가 뒤돌아봤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식은땀 한 줄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어쩌면 이상한 놈한테 된통 걸린 게 아닐까. 그래도 이제 거의 볼 일이 없을 거고 그놈이 저놈이라는 보장은 없는 거니까. 전영중은 애써 불길한 예감을 떨쳐냈다. 당장 내일 무슨 폭탄이 떨어질지 까맣게 모른 채로 말이다.
전영중은 그다음 날도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도 일상이 반복되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변주 없이 따분한 되풀이가 불안을 가라앉혀주지 못했다. 어쩐지 현실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휘성이 잠꼬대하는 소리가 너무 평화로워서 붕 뜨는 느낌을 배가되게 했다.
알리바이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심장 떨어지는 느낌. 그 엄청 무섭게 생긴 형사가 서슬 퍼런 기세로 그를 몰아붙일 때의 발밑 꺼지는 듯한 두려움. 그 감정들이 갓 잡은 생선처럼 생생하게 퍼덕거리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벽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갑자기 일상이 뒤집혔고, 제대로 된 마무리도 없이 어물쩍 돌아와 버렸다. 그렇다면 언제든지 전조 없이 박살날 수 있는 연약한 게 아닐까? 그런 불안감이었다. 그때, 그놈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전영중은 갑작스레 몰려오는 불쾌감을 무시했다. 왜 불쾌한지 이유도 곱씹어보지 않은 체 말이다.
어쨌든 그는 평소 행동하던 관성대로 운동장을 돌고, 아침 식사를 한 뒤 씻고 학교에 갔다. 반에 와보니 교실이 소란스러웠다. 같은 반 애들이 창문에 우르르 몰려있었다.
“무슨 일이야?”
“야. 저기 봐봐.”
평소에 데면데면하게 인사만 하던 사이인 친구가 운동장을 가리켰다. 교장이 운동장에서 사람 한 무리에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손에 든 마이크와 어깨에 얹은 커다란 카메라를 보니 기자들 같았다. 교장은 어찌나 화가 난 건지 이 거리에서도 목덜미까지 벌겋게 붉어진 게 보일 지경이었다. 이 꼴을 학생들이 재미있다고 낄낄거리면서 구경하고 있었다.
야만스럽기가 원숭이와 다름없는 고등학생 무리는 담임이 반에 들어오고 나서야 해산해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담임이 교실 TV를 켰다. 보통은 간단하게 전달 사항을 알리면 아침조례 시간이 끝난다. TV를 켜서 봐야 하는 전체 조례는 하는 때가 정해져 있었고, 오늘은 그날이 아니었다. 아마 살인사건으로 인한 학생들의 동요를 막고자 갑작스럽게 방송하게 된 것이리라.
전영중은 담임 눈치를 봐가며 교과서를 책상 위에 쌓아 높이를 맞추고 그 위에 팔뚝을 베고 엎드렸다. 그건 이제 그와 상관없는 일이다. 이미 험한 일 겪고 실컷 시달리다 범인으로 몰릴 뻔했고, 간신히 누명을 벗었는데 여기서 더 책잡힐 게 있을까?
TV의 조례 소리는 지루하고 단조로웠고, 아침 9시를 살짝 넘은 봄날 교실의 공기는 포근했다. 사방으로 돌림노래처럼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고 창밖에서는 새가 짹짹거렸다. 어제 잠을 설쳐서일까. 그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등골을 따라 소름이 주르륵 돋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전영중을 깨웠다. 들어본 적 있는, 서늘하고 예리한 목소리였다.
“…등학교 학생 여러분. 저는 ■■ 경찰서에 근무하는 형사 유미경입니다. 앞서 교장선생님께서 설명해 드렸다시피, 어제 정인우 학생이 사망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유감과 애도를 표합니다.
원활하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학생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피해자에 대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 사항이 있다면 여기 박병찬 형사에게 제보 부탁드립니다.
전달 사항은 이상이며, 다시 한번 적극적인 협조 부탁드립니다.”
전영중은 멍청하게 TV를 쳐다봤다. 어제 그를 살벌하게 몰아붙이던 형사는 오늘은 남들 앞에 나서는 자리여서인지 흰 티에 슬랙스 정장 차림이었다. 단정하면서 격식을 엄격히 따르지 않은 복장이었는데, 현명한 선택이었다. 저 얼굴에 정장을 갖춰 입었다면 수금하러 나온 조직폭력배 우두머리를 연상시켰을 것이다. 그것도 훈장처럼 얼굴에 긴 칼자국이 남은 조폭.
흉터와 험악한 얼굴의 아우라가 충격적인 건지, 아니면 뜬소문으로 돌았을 살인을 확인받아서인지 교실이 술렁거렸다. 그런데 박병찬이라고 했나? 저 젊은 형사님 잘생기지 않았어? 그치! 앞에 앉은 애들이 서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닐 수도 있고.
“얘들아.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시니까 조용히 하고 마저 집중하자.”
담임이 반 학생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 험악한 형사는 교장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공지가 있습니다.
어제 교직원 회의를 거친 결과, 학교 구성원들의 안정을 위해 오늘은 3교시까지 단축 수업을 운영할 것이며, 당분간 학교 시설을 6시까지 운영할 예정입니다. 단축 운영이 끝나는 정확한 날짜는 추후 공지할 것입니다. 그동안 학생 여러분은 안전을 위해 되도록 혼자 다니지 말고, 학교를 마치면 일찍 귀가하길 바랍니다.”
저 늙다리가 뭐라는 거야? 전영중은 자신의 청력을 의심했다. 기차 화통 삶아 먹은 팔척장신들이랑 24시간의 대부분을 함께하니까 청각 신경이 벌써 맛 가려 할 수도 있었다.
“자. 교장 선생님 말씀 들었지? 오늘은 3교시까지 수업할 거고, 급식은 주니까 수업 끝났다고 빼먹고 가버리면 안 된다. 학교 일찍 끝난다고 탱자탱자 놀지 말고, 슬슬 중간 준비도 하고. 그리고 되도록 당분간은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일찍 집 가라. 혹시 질문 있니?”
전영중은 공손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영중아. 뭐가 궁금하니?”
“아까 교장쌤이 학교 시설을 6시가 되면 닫는다고 하셨는데 거기 체육관도 포함되나요?”
“어. 체육관뿐만 아니라 도서관, 동아리방, 자습실도 닫을 거다. 기숙사 시설들은 평소 닫는 시간에 닫을 거고. 혹시 농구부 활동 때문에 그러니?”
“네….”
“그건 감독님이랑 코치님께 여쭤보는 게 좋겠구나. 대책이 있으실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더 궁금한 거 있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빨리 조례를 끝내고 자유를 얻고 싶다는 갈망이 느껴졌다.
“그래. 그러면 여기서 아침조례 끝!”
담임이 조례 끝을 선언하자, 학생들은 오늘의 이슈에 대해 떠들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전영중도 곧바로 교실 밖으로 뛰쳐나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대책이 있긴 무슨! 시합 한 달 전에 폭탄이 떨어졌는데!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감독님은 엄청나게 철두철미하신 분이니 뭔가 해답이 있을 거라는 희미한 기대가 피어났다.
그 연약한 희망은 곧 박살 났다. 그는 코치가 있는 교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벽에 비스듬히 몸을 감추고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봤다. 코치가 있긴 했다. 감독도 같이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었고 코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야. 뭐 보냐?”
전영중은 뒤를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박교진이 서 있었다. 이휘성도 같이 있었는데 오다가 마주친 모양이었다.
“너 들었냐?”
“6시에 체육관 문 닫는다는 거? 아니, 이게 무슨….”
“대회 한 달 남았는데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교장 새끼가 노망났나?”
박교진이 식식거렸다. 이휘성은 별말을 하지 않았으나 불만 가득한 표정은 그가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래서 코치님이랑 감독님은…. 귀찮게 하지 않는 게 좋아 보이지?”
박교진이 조심스럽게 교무실을 들여다보았다. 코치와 감독이 같이 머리를 싸맨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그냥 가고 일단 우리끼리 생각해 보자. 그런데 지국민은 어디 갔어?”
“엇갈린 건가? 일단 걔 반에 가볼래?”
“그러자.”
이휘성의 제안대로 그들은 3학년 1반으로 향했다. 조재석과 우수진이 뒷문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2학년들은 방송을 듣고 바로 지국민의 반으로 향한 것 같았다. 전영중이 물었다.
“지국민 뭐해?”
“자고 있어요.”
조재석이 대답했다. 지국민은 주장이라는 놈이 지금 농구부의 앞날에 날벼락이 떨어졌는데도 회색 체크무늬 담요를 엎은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기세였다. 물론 2미터짜리를 업어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말이다.
“야! 지국민!”
박교진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지국민은 움찔거리기면 할 뿐 일어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쩐다. 다른 반에 함부로 들어가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너희 지국민 보러 왔어? 깨워줄까?”
다행히 구원자가 있었다. 이규빈이었다. 그는 작년에는 전영중과 같은 반이었고, 올해는 지국민과 같은 반이라 낯이 꽤 익은 편이었다. 그런데다 어제 같이 살인사건에 휘말려서 취조당해서인지 희미하게 동지로서 동질감이 생겨났다.
“그래 주면 고마워.”
이규빈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더니 지국민을 거칠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꿍얼거리기만 할 뿐 도무지 잠에서 깰 것 같지 않았다.
“안 깨는데?”
이규빈이 외쳤다. 전영중이 짜증냈다.
“저 새끼 키로 군 면제 받으려고 저러나? 박교진. 쟤 어제 늦게 잤어?”
“몰라. 평소처럼 잤겠지.”
“너희들이 들어와서 깨우면 안돼? 거기 곱슬머리는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막 반에 들어오던데.”
“저도 이제 철들어야죠.”
조재석이 멋쩍어했다. 그는 2학년에 주전 자리를 따낸, 실력이 출중한 슈터고 농구부의 에이스지만 전영중은 이럴 때마다 조재석이 참 부끄러웠다.
“안 이를게. 그렇다고 내가 쟤를 팰 수는 없잖아?”
“패도 돼. 그냥 패. 쟤 튼튼해. 어지간해서는 멍도 안 들 거다.”
박교진이 되먹지 못한 소리를 내뱉으며 무책임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건 좀. 쟤 손이 더 아프겠다.”
이휘성이 박교진을 말렸다.
“얘들아. 제발.”
전영중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박교진과 이휘성을 흘겨봤다.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주둥이로 내뱉는다고 다 말이 아닌데.
“일러바치지 않을 테니까 너희들이 깨워.”
“그러면 실례할게.”
전영중은 양해를 구하고 남의 반에 들어가서 지국민의 등을 쓸어내렸다.
“국민아. 일어나라.”
지국민은 뭔가 웅얼거렸다. 아마 5분만, 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전영중은 친구를 곱게 깨우려고 시도함으로써 최소한의 도리를 다했다. 그는 지국민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담요가 충격을 흡수해 곰이 앞발로 나무 둥치를 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지국민은 몸을 비틀며 책상을 뒹굴었다.
지국민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원흉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전영중을 발견한 즉시 멱살을 틀어잡았다. 눈물이 찔끔 났는지 눈가가 촉촉했다. 전영중은 손을 뿌리치고 뒷문을 엄지로 가리켰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친구들과 후배들 보고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무슨 일이길래 다 모여있냐?”
“너 쳐 자느라 방송 안 봤지? 기억 나는 게 있긴 해?”
“하나도 없는데. 뭔 중요한 거라도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으면 너는 나한테 뒤진다. 씨발, 깡패 새끼도 아니고 사람을 패냐?”
“니가 곱개 깨울 때 안 일어났잖아. 아무튼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어. 뭐부터 들을래?”
“좋은 소식부터.”
“오늘 수업 3교시밖에 안 해. 3교시까지 하고 급식 먹으면 수업 땡이야.”
“오. 개꿀.”
지국민은 수업이 일찍 끝난다는 게 그렇게 기쁜지 전영중한테 맞아서 아픈 건 그새 잊어먹고 히죽거렸다.
“나쁜 소식은 오늘부터 6시 이후로 체육관 못 쓴데요.”
우수진이 끼어들었다.
“뭐?”
“네가 할 얼간이 같은 질문에 미리 대답하자면, 우리 전부 똑똑히 들었어. 절대 졸거나 멍때리거나 해서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교장이 위험하니까 6시 이후로 학교 본관 문 닫을 거고, 학생들은 집에나 처박혀 있으라고 했어.”
전영중은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비보를 들은 지국민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사람 죽었으니까 애들은 해 떨어지기 전에 싸게싸게 다니라고 체육관 셔터를 6시에 내린다고?”
“오. 웬일로 한 번에 이해를 잘했냐?”
박교진이 감탄했다.
“교장 새끼 아침에 소주 깠냐? 대회가 한 달 남았는데 우리는 어쩌라고? 감독님이랑 코치님은?”
“교무실 가봤는데 골치 아프신 것 같아서 그냥 돌아왔어. 시간 지나고 다시 찾아가 보게.”
“아니, 애초에 사람은 기숙사에서 대낮에 죽었다고. 해 지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의외로 지국민이 맞는 말을 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영중도 동감했다. 이럴 거면 학교를 아예 오지 말라고 하던가. 그건 못 하겠으니 어중간하게 6시에 문을 닫는다고 해서 농구부가 얻어맞은 거라 불쾌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나한테 왜 온 거야?”
“다 같이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자고.”
이휘성이 대답했다.
“그런데 저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우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데?”
“이거 저희끼리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까요?”
예리한 질문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그러게.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운동부 고등학생끼리 모여서 머리를 맞대봤자 좋은 수가 나오긴 할까? 그렇지만 속수무책으로 기다리기만 하기 싫었다. 그들의 진로가 달린 일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농구에 영향을 주는 일이었다. 그들의 꿈이 걸린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변화에 따라 휘둘리기만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갑자기 지국민이 손뼉을 쳤다.
“아이, 깜짝이야.”
곰곰이 고민하고 있던 이휘성이 깜짝 놀랐다.
“야. 나한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국민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전영중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저놈 머리에서 떠오른 게 좋은 생각일 수가 있을까? 이상한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지. 조재석이 이곳저곳으로 다 튀는 미친 탱탱볼이라면 지국민은 시야가 좁고 단순하기 때문에 간혹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나가는 럭비공이었다. 그를 좋은 주장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그거랑 별개의 문제였다.
네가 도대체 뭔 사람 뒷목잡게 만드는 발상을 떠올린 거냐고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1교시가 시작한다고 학교 종이 울렸다. 수업을 까먹고 있었다. 지각 처리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빨리 뛰어가야 했다.
“있다가 학교 끝나면 컴퓨터실 앞에서 만나자!”
지국민이 지각을 면하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팀원들에게 외쳤다. 전영중은 기도했다. 제발 저놈이 괴랄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지국민이 그들을 데려간 곳은 컴퓨터실 옆에 붙어있는 3D 프린터실이었다. 4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인재 양성을 위한 공간. 이것이 문 옆 벽에 붙어있는, 포토뉴스를 그대로 뽑아 붙인 듯한 포스터가 설명하는 3D 프린터실의 목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포스터는 3D 프린터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함께 그것의 간단한 사용법도 설명했다.
일반 학생들의 3D 프린터실에 대한 인식은 컴퓨터 동아리의 놀이터였다. 원칙적으로는 3D 프린터 사용 교육을 받은 뒤, 학교 홈페이지에서 사용을 신청하면 누구나 공짜로 3D 프린터실을 쓸 수 있지만 굳이 예약까지 해서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구부원들이 3D 프린터실에 들어가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최근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교실에 들어찬 설비들은 새것의 깔끔함을 지니고 있었다. 긴 탁자 위에는 3D 프린터가 놓여있었다. 남는 벽면에는 철제 진열장이 있었고, 다양한 모양의 플라스틱 조각들이 놓여있었다. 3D 프린터로 뽑은 출력물 같았다. 다양한 원색들은 장난감을 연상케 했다.
수집가가 세운 장난감 박물관 같은 분위기 때문일까. 각자 관심 있는 프린트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형, 형! 이거 봐요! M16 소총이에요!”
흥분한 조재석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길쭉한 총구를 전영중의 볼에 찔러댔다. 믿었던 우수진도 마X오 게임에서 본 적 있는 버섯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저걸 먹으면 캐릭터가 커졌던가?
“여기 봐봐. 여기 피X츄 있다.”
“헹. 그게 무슨 피X츄야. 그건 피X고. 이건 이X해씨, 저건 망X뇽.”
이휘성과 박교진은 노란색 모형을 가리키면서 지들끼리 노닥거리고 있었다. 컴퓨터 동아리의 누군가가 포X몬을 좋아하기라도 하는건지 유독 포X몬 모형이 많았다. 그걸 박교진이 다 종류를 읊고 있었다. 그에게는 남동생이 둘이나 있는데, 그 영향인 것 같았다. 그래도 저걸 보고 피X츄라니, 그건 좀 아니지 않은가? 전영중도 그건 아닌 걸 아는데.
“여기 왜 온 거야? 갑자기 이런 데 흥미 생겼어?”
전영중은 조재석을 밀어내며 지국민에게 따졌다.
“여기 기상호가 잘 온대.”
“기상호?”
“어제 너 구해준 애.”
걔 이름 김다은이라고 하지 않았나? 워낙 정신이 없었으니 잘못 들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상호든 김다은이든, 그는 여기 없는 것 같았다. 농구부를 빼면 사람이라곤 테이블에 앉아 있는 후드 쓴 학생밖에 없었다. 컴퓨터 동아리원인지 그는 휴지 위에 놓인 황동 부품을 꼬챙이로 청소하고 있었다.
“여기 없는데 어쩔 거야?”
“쩝. 맨날 시간 나면 여기 온다 그러던데. 도서관이랑 컴퓨터실에도 자주 출몰한다고 하니까 거기도 가봐야겠다.”
“혹시 저 찾으세요?”
어디서 또랑또랑한 소리가 들렸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후드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후드를 벗고 헤드셋을 뺐다. 그래도 야구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인상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전영중이 이상하게 쳐다보자 실수를 깨달았는지 야구모자와 마스크도 마저 벗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왼눈 밑 눈물점. 기상호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 범죄자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후드와 캡모자, 마스크를 쓰고 다녀도 괜찮은 건가?
“3D 프린터 쓰러 오신 거예요? 사용법 봐 드릴 수 있어요.”
“그러면 나 권총 뽑아줘! 리볼버! 1대1 사이즈로, 기왕이면 탄창 돌아가…. 으브븝.”
전영중은 흥분한 조재석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는 옷 입은 꼴이 왜 그러냐?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학교가 어수선하잖아요. 이런 때일수록 쪽은 덜 팔릴수록 좋은 거예요.”
기상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도로 야구모자를 쓰고 후드를 덮어썼다. 농구선수 평균 신장이 일반인 평균보다 월등해서 와닿지 않은 거지, 기상호의 키도 큰 축에 속했다. 그 키에 날카로운 인상으로 어제 사람 죽은 학교에서 음침한 차림을 하고 있으니 누가 수상하다 신고한다 해도 손색이 없었다.
“음, 일단 그때 영중이 구해준 거 고마워. 농구부 대표로 감사를 표해.”
지국민이 가볍게 목례했다.
“뭘요.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혹시 경찰이 전영중 형 귀찮게 하고 그래요? 제가 거기 갈 때 녹음을 해놨어요. 필요하면 보내드릴 수 있어요. 아니면 법적인 도움이 필요한가요?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변호사를 알고 있어요. 연락처 드릴까요?”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저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나요? 한가하게 감사 인사만 하려고 온 건 아닐 거잖아요.”
“그렇지. 크. 얘기가 빨라서 좋네. 네가 범인을 찾아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전영중이 참지 못하고 지국민에게 따졌다. 이 자식이 어제 잠 잘못 잤나? 정신 차리라고 아까 더 세게 때릴걸. 후회가 되었다.
“야. 생각을 해봐. 지금 체육관 6시에 문 닫는다 그러는 이유가 뭐야?”
“사람 죽어서지.”
“그래. 정확히는 학교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범인이 안 잡혀서지. 상황 보면 학교 관계자가 죽인 걸 텐데 범인이 안 잡혔으면 살인자가 버젓이 학교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리잖아?”
“그래서 어쩌겠다고.”
“그놈 찾아서 우리가 가서 자백하라 설득하면 되지! 그러면 사건 해결 야냐? 범인이 잡히면, 우리보고 조심하라 할 이유가 없잖아.”
“국민아.”
“꽤 괜찮지 않냐?”
지국민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을 한 게 맞아? 아니면 네가 짱돌을 굴린 게 그 지경인 거야?”
전영중은 지국민의 해맑은 궤변을 들으니, 머리가 아파왔다. 살인자가 학교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시설 문을 일찍 닫게 한 걸테니 범인을 잡아다 바쳐서 해결해 버리자. 제 딴에 머리를 쓰긴 했다. 그런데 평균 신장 191의 사내새끼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자백하라 종용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공갈협박으로 정의되지 않는가? 그러면 문제가 커진다. 체격과 체력이 월등한 운동선수가 물리력을 휘두르거나 그럴 낌새를 보이는 건 절대 좋게 보이지 않는다. 전영중은 그런 프로 생활을 하면서도 두고두고 화자 될 수도 있는 문제를 절대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범인은 어떻게 찾게? 니 돌대가리로? 아니, 설마….”
“그래. 그건 얘가 해줄 수 있어.”
지국민이 기상호를 붙잡아다 앞으로 내세웠다. 전영중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현실이 무슨 탐정소설인가? 경찰이 철밥통 공무원이라 해도 날로 먹는 직업 같아 보이나? 이 자식은 원체 독서를 안 해서 추리소설을 읽어보지도 않았을 텐데 저딴 발상은 어떻게 해낸 걸까?
“괜찮은 아이디어예요. 자수만큼 확실한 건 없거든요. 자수는 추후에 번복하더라도 효력이 남아요. 그런데 아주 커다란 장애물이 남아있어요.”
“뭔데?”
“바로바로~ 본인의 의사요.”
“에이. 해줄 거잖아.”
“맡겨놨어요? 하기 싫은데요?”
기상호는 사람 무안해지게 부탁을 칼같이 거절하더니 머리를 숙여 지국민의 팔을 벗겨냈다. 그리고 도로 3D 프린터 부품을 도로 조립하는 데 몰두했다.